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I ‘푼토 휘호(Punto fijo) 체제’와 포퓰리즘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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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감독님의 좋은 지적에 자극받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금권에 기반을 둔 좌우 거대 양당이 탁구공 치듯이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의 이익에 대한 항구적 보장 협약이 사전에 선행되어 있으므로, 누구에게 (표면) 권력이 이양되어도 특권이 보장되며 인민에 대한 무자비한 지배의 사슬은 절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지배가 심화하게 만들어 놓은 ‘푼토 휘호(Punto fijo) 체제’라는 개념은 비단 베네주엘라 정치를 설명하는 데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서구 정치 시스템을 이식한 ‘모든’ 국가들에 범용 될 수 있습니다. 일종의 ‘햄스터 쳇바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인민들이 특정 정치·경제적 충격 — 베네주엘라의 경우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폭력인 물가 폭등, 유럽은 긴축 테러 등등 — 에 의해서 자신들이 쳇바퀴에서 죽으라 달렸던 햄스터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고 각성한 인민 숫자도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그리고 교활한 “민주주의” 메트릭스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들 진짜 ‘적(foe)’이 상대 정당이나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과두를 정점으로 구축된 카르텔 체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이 카르텔의 구조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사/금융/산업/정치/사상/문화적 지배를 넘어 수천 년 동안 묵혀진 신학적 증오와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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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민의 각성이 특정 지도자를 만나 그 세력이 그간의 ‘푼토 휘호(Punto fijo) 체제’에 균열을 내고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게 되면, 미디어 하이에나들은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낙인 찍으며 맹렬히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소수의 이해가 관철되도록 정교히 시스템화되어 있던 ‘쳇바퀴 감옥’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포퓰리즘 무리”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오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래서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발악하는 것입니다.
“저기, 늑대가 몰려온다~~~ 포퓰리즘 폭도들이 몰려온다~~~ 저들은 악마야~~~~~~ 저들을 죽여라~~~~~~ ”
포퓰리즘은 경제자유주의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불살라버리는 강력한 휘발성과 파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범죄적 지배 카르텔은 자신의 기존 특권과 약탈의 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하여, 이를 극렬하게 매도하고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고 낙인찍어 악마화시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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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Ernesto Laclau)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은 좋은 겁니다. 정치적 인간의식의 저변에는 분명 ‘포퓰리즘 이성’이 내재하여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나를 ‘대표’해주고 내게 ‘위안’을 주고 내게 ‘밥’을 주는 지도자를 따르려는 열렬한 마음…. 그게 포퓰리즘 이성 아니겠습니까! 특정 연예인을 환호하는 팬덤(fandom)현상도 알고 보면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려는 포퓰리즘 심성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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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차베스 대통령도 무슨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게 아니라 정상적 선거 절차를 통해 집권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엄연히 합법적 ‘선거권력’인 셈이죠. 문제는 차베스 개인이 아니라 차베스라는 ‘상징’을 통해 ‘접합’된 인민의 응집이 — 마치 흩어진 작은 영혼들이 하나의 거대 영혼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집단 영혼(collective soul)으로 웅비하듯이 — 초국적 과두와 국내 과두세력이 ‘교미’하여 출산한, 에이리언(Alien) 괴물 같은 기형적 지배체제를 청산시킬 수 있는 폭발적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억눌린 인민의 다기한 욕구가 한 곳으로 수렴되는 동시에 그 욕구를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걸출한 지도자(혹은 지도 그룹)를 만남으로써 — 양자가 부르주아적 의식분산 공론장이라는 늪의 방해와 왜곡을 우회하여 — 혼융일체가 되어 ‘판’ 자체를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 포퓰리즘의 혁명성이죠. 지금 프랑스 노랑조끼 운동의 경우에는 ‘혁명적’ 포퓰리즘으로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인 응집된 인민과 지도자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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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이론의 ‘정교화’가 필요합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포퓰리즘 관련 서적은 그 입장이 모두 한결같이 “늑대가 몰려온다~~~ 포퓰리즘 폭도들이 몰려온다~~~” 라는 신경 분열적, 정신 착란적 입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집필자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이 뭐냐에 따라 포퓰리즘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좌우 다 같이 포퓰리즘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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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영미 학계에 포퓰리즘에 대한 뭐 그럴싸한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껏 해봐야, 벤자민 아르디티(Benjamin Arditi) 정도인데, 그는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나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서구 “민주주의” 메트릭스 자체를 없애겠다는 생각은 없고 단지 그 ‘흉물’을 그대로 존속시킨 상태에서,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증상’이란 개념을 ‘복붙’해서, 이 (포퓰리즘) “증상”이 개인의 자아 형성을 위한 본능의 억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대리 표상’이자 ‘내부의 주변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즉, 인민의 정치적 해방의 ‘중심부 현상’을 무슨 증상 운운하면서 ‘주변부’로 ‘가볍게’ 밀쳐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서구 좌파이론가들이 보여주는 민주주의 공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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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 무슨 병입니까, 증상이게? 그리고 만약 “서구식 야매 민주주의”가 햄스터 쳇바퀴라면 이걸 부숴버려야지 그걸 왜 유지한다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궁핍과 영혼부패와 관계의 뒤틀림과 전쟁의 무한 반복인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인민들을 주변주 증상에 시달리는 환자로 취급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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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노오스 다코다(North Dakota)에서는 오래전부터 초국적 금융 괴수들의 질서에서 이탈하여 공공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노오스 다코다 뱅크(the Bank of North Dakota)가 그 주역입니다. 소리 소문 없이 마치 스텔스기처럼 금융 주도 ‘푼토 휘호(Punto fijo) 체제’를 폭격하는 모습이 제국의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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