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터키(Turkey) 현대 정치사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케말 파샤와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의 정체 (2 of 3) I
2019년 02월 18일 ·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I 터키(Turkey) 현대 정치사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케말 파샤와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의 정체 (2 of 3)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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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과 유대인의 비밀스러운 관계(The Secret Relationship Between Blacks and Jews)』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럽 국가들이 유대인 집단을 강제 추방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추방한 이유는 주로 비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독점 행위 그리고 종교적 이단 행위와 유대교의 ‘특이한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1,500년 경이 되면 이탈리아 몇 개 지역을 제외하고 서유럽 국가들이 그들에 대해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아래 목록은 유럽 국가들[혹은 도시들]이 유대인 집단을 추방한 연도들 중 일부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Mainz, 1012
Upper Bavaria, 1442
Genoa, 1515
France, 1182
Netherlands, 1444
Naples, 1533
Upper Bavaria, 1276
Brandenburg, 1446
Italy, 1540
England, 1290
Mainz, 1462
Naples, 1541
France, 1306
Mainz, 1483
Prague,1541
France, 1322
Warsaw, 1483
Genoa, 1550
Saxony, 1349
Spain, 1492
Bavaria, 1551
Hungary, 1360
Italy, 1492
Prague,1557
Belgium, 1370
Lithuania, 1495
Papal States, 1569
Slovakia, 1380
Portugal, 1496
Hungary, 1582
France, 1394
Naples, 1496
Hamburg, 1649
Austria, 1420
Navarre, 1498
Vienna, 1669
Lyons, 1420
Nuremberg, 1498
Slovakia, 1744
Cologne, 1424
Brandenburg, 1510
Bohemia/Moravia, 1744
Mainz, 1438
Prussia, 1510
Moscow, 1891
Augsburg, 1439”
위에 열거된 수많은 추방 중에서 유럽사, 더 나아가서 세계사 전체 방향을 ‘홱까닥’ 바꿔버린 가공할만한 충격파를 던져 준 것은 단연코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된 30만에 달하는 이 세파르딕 유대인 집단(Sephardic Jews)은 향후 네덜란드를 장악해 왕 없는 정치체제인 공화국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초국적 무역 파워와 네트워크로 발흥하는 신흥 강국 영국을 집어삼키고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해 국제금융 과두가 되기 위한 기반을 다졌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장악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통해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전역에 식민지를 구축함으로써 ‘제국주의’가 뭔지를 단단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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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카톨릭제국이 행한 이교도 심문인 종교재판(the Inquisition)은 — 글로벌 마인드 콘트롤 세뇌공장인 헐리웃 영화판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랄한 것으로 매도하며 끝없는 저주와 조롱을 퍼부으며 찍어대는 역사 왜곡 중 하나인 — 기본적으로 카톨릭 제국 붕괴를 목표로 삼아 호전적으로 덤비는 에라스무스주의 그리고 (알고 보면 ‘유대교 2중대’인 다기한 프로테스탄티즘-루터파/장로파/쯔빙글리파/칼뱅파-의 옷을 입은) 유대교 이단(heresy)의 침투로부터 카톨릭제국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함이었다. 게다가 경제 특권 계급인 유대인 금융집단의 도를 넘는 고리대금업과 각종 상행위와 무역 독점으로부터 야기되는 소수에게로 경제력 집중과 빈부 양극화 그리고 그로 인한 공동체 해체로부터 제국 신민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스페인 전역과 신세계 식민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벌어진 종교재판의 성격을 한 가지 요소로 규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우 자르듯’ 하나의 원인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여러 요인들이 다중적으로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이다. 가령, 스페인(포르투갈)에서 개종한 유대인인 ‘신기독교인(New Christians)’ 혹은 ‘콘베르소(Conversos)’ 집단이 향유하는 — 결코 공정해 보이지 않는 수단을 통해 획득된 것으로 의심받는 — 경제적 헤게모니에 반감을 품은, 몰락 일로의 기존 토착 하층 귀족세력인 ‘구 기독교인(Old Christians)’의 원한과 도전이 여기에 크게 한 몫 하기도 했다. 우리로 치면, 가령 조선 시대 토착 양반세력들 중 많은 수가 몰락해 잔반(殘班)이 되어 사회계층 위계질서에서 수직 추락을 경험하고 있는 와중에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외부 집단’(예를 들면 왜구나 말갈족 혹은 여진족 같은 이들)이 자신의 곤궁한 처지와는 너무나 상반되게 호의호식하며 수완 좋게 재산을 불려나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분노 어린 심정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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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3월 3일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추방령인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이 반포되었다. 그래서 그 해 8월 2일에는 약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들 중에는 소수지만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와 전통 관습을 지키기 위해서 스페인을 등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스페인에서 쫓겨 나가는 경우에 해당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돈벌이 기회를 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스페인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게 약 50만 명의 스페인 거주 유대인은 정든 스페인을 떠나지 않고 독실한 혹은 독실한 척하는 카톨릭교도로서 그냥 스페인에 눌러앉아 사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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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은 외부자인 유대인들이 사회계층 사다리의 최상층부에 올라 서서 ‘울트라 갑’이 되어 스페인을 잠식해 들어가는 정도가 도를 넘는 수준으로 진행되자 밑으로부터 토착 인민의 끓어오르는 원성과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를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스페인 자체의 존립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왕을 위시한 토착 귀족세력들이 유대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일종의 ‘거국적 합의’를 본 것으로 해석된다.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은행가, 국제무역상인, 국가재정과 세금 수납 관리자 그리고 고리대금업자 등으로 활약하며 제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머니 브레인(money brain)’이었으며 동시에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상층부로 진입하여 특권층을 형성했던 ‘이너 서클(inner circle)’이었다.
사실 이 추방 원인 규명 문제는 보다 풍부한 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추방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추방의 진짜 목적이 스페인의 종교적 포용력 부재와 막대한 “유대인 소유 재산의 강탈”로 보이는 반면에 스페인 토착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에서 굴러온 돌’이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게다가 정치적으로 점차 통제 불가능한 언터쳐블 독자 세력이 되어감에 따라 스페인이라는 나라 안에 유대인의 나라가 ‘알박기’를 하는 꼴이 되어, 나라가 절단 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상황 판단에 의해 추방을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의 전형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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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스페인을 떠난 30만 명이나 되는 이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5세기의 미국이었던 스페인에서 . . . 그것도 화려한 도시에서 풍요롭고 뽄때나게 살아왔던 이 세파르딕 유대인들(Sephardic Jews)은 이제 제각기 살 길을 찾아 지구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옮겨간 대표적 정착지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거주 지역과 네덜란드의 안트워프(Antwerp) 그리고 서유럽, 동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인 터키와 관련해서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살로니카(Salonica)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살로니카는 현재 그리스 영토에 속한다). 왜냐하면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가 바로 거기에서 태어났고 유년기를 거기서 보냈기 때문이다. 유대 랍비에게 초등 교육을 받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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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터키의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은 17세기 중반 전세계 유대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자칭 유대 메시아 사바타이 제비(Sabbatai Zevi)라는 ‘이단 끝판왕’ 랍비를 추종하여 그를 따라 터키까지 흘러 들어온 유대인들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그 후손들이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건국된 터키에서 과거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착 세력을 제치고 사회 상층 핵심부로 진입해 단단한 네트워크를 가진 독자 세력이 되었다. 이 돈메(Dönmeh) 집단은 유대 카발라(Kabbala)와 이슬람 반(半)신비주의 수피즘(Sufism)을 적당히 섞어 만든 특이한 자신들만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통 유대교도 아닌 뭐라 규정짓기 힘든 ‘하이브리드 이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반율법주의적 ‘능동적 메시아주의’가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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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유대 시오니즘 세력은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압둘하미드 2세(Abdulhamid II)가 재위에 있을 당시 그러니까 1800년대 후반에 그에게 접근해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팔레스타인 땅이 필요하니 1억 5천만 파운드를 받고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영토를 자신들에게 양도하라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압둘하미드 2세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오스만 영토인 팔레스타인 땅의 1인치도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는 “유대인에게도 조국이 필요하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진 테오도르 헤르츨과 시오니즘 세력에게 찬 물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로부터 압둘하미드 2세는 국제 시오니즘 세력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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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은 살로니카(Salonica) 태생의 케말 파샤를 지도자로 삼은 ‘청년 터키인들(Young Turks)’이 주축이 되어 1908년 혁명을 통해 오스만 제국 마지막 술탄이자 시오니즘 세력의 ‘공공의 적’인 압둘하미드 2세(Abdulhamid II)를 살로니카 감옥으로 보내버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여 공화인민당(CHP)을 만들어 이후 1959년까지 장장 27년 동안 일당독재 철권통치를 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터키는 극단적 서구화와 세속주의를 ‘국시(國是)’로 삼아 이슬람 전통이 사회의 공적 공간에 절대 들어서지 못하게 철저히 탄압했으며 이슬람의 재정적 기반을 무너뜨리는데도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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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터키는 15만 명(혹은 150만)의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이 정부와 군부, 정보부, 사법부, 언론, 교육, 기업 등을 망라한 터키 전체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은 수면 아래 심층 국가(Deep State)를 구축하게 된다. 원래 ‘심층 국가(Deep State)’라는 용어 자체가 ‘묻지마 서구화’로 요약되는 ‘케말리즘’을 억압적으로 지탱시키기 위한 터키 정치 특유의 ‘지하 네트워크’를 포착하기 위해 제출된 개념이었다. 이 개념의 오리지널 상표권은 터키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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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외교적 방향은 NATO 회원국으로 미국의 충직한 하위 파트너가 되었고 내치는 우리의 유신 시대와 흡사한 경찰 독재국가가 되었으며 경제는 소수 과두 세력이 장악한 ‘정실주의(patronage)’와 후견주의(paternalism)가 지배적 작동기제가 되었다. 결국 터키는 조지 오웰의 1984년식 국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서구화의 정치적 핵심인 ‘민주주의’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케말주의 독재 정당인 공화인민당이 27년 간의 ‘단순무식한’ 일당독재가 한계에 봉착하자 ‘울며겨자먹기’로 1946년 다당제를 도입한 이후 치루어진 1950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86.2%(420석)를 득표했고 이후 1954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경이적인 수치인 93.2%(505석)를 획득하여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 민주당 지도자인 아드난 멘데레스(Ali Adnan Ertekin Menderes) 총리는 이상하리만치 터키 대중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터키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터키의 마르크스 계열 라이벌 정당 지도자들은 그가 유별나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몹시 의아해했다. 그들이 보기에 멘데레스가 무슨 대단한 경제정책을 펼친 것도 아니고 획기적 노동정책을 시행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인기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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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들이 멘데레스 총리를 마음 깊이 따르고 존경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이슬람에 대한 포용 때문이었다. 발악적으로 이슬람을 질시했던 케말파샤 일당들과는 달리 시골 촌부의 마음으로 인민을 대했던 멘데레스 총리는 무신론적 유물론자들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이슬람적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터키 인민들은 그에게서 자애로운 술탄의 풍모를 느꼈던 것이다. 팍팍하고 힘겨운 삶 속에서 믿고 의지할 소박하고 선량한 술탄이 생긴 것이다. 비록 오스만제국의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가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 집단 기억 속에는 아직도 아련하게 이슬람 공동체의 시(詩)와 같은 추억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생활 형편을 빠르게 나아지게 하는 것이 정치의 전적인 목표가 되어 버린 지금의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감성의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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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밀 유대인 돈메(Dönmeh) 집단은 1960년 5월 27일 쿠데타를일으켜 민주당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교수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터키 인민은 그의 죽음에 숨죽여 흐느끼며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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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케말리즘은 터키 인민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서구화를 빙자한 ‘이슬람 공동체의 말살’이며 ‘이슬람 심성의 파괴’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이슬람이 삭제된 근대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전통적 사유를 상실한 뿌리 없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영혼 없는 소비자
외로운 모래알
초조함이 의연함 대신에 자리잡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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