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완정 시론

I 이집트 정치 단상 (3) I / 진리를 향한 이정표 /

신현철

 

I 이집트 정치 단상 (3) I

/ 진리를 향한 이정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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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내에서 가장 잘 조직된 정치 기반과 대중 동원 능력을 갖춘 조직이다. 실제로 지금 당장 국가를 경영한다고 해도 별 손색이 없을 만큼 사회 곳곳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집권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세력도 있다. 사우디 왕정), (2) 이집트 군부, (3) 국내 과두세력, (4) 서구식 세속 민주파는 모두 무슬림형제단을 엄청 싫어한다. 물론 제각기 반대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은 공통으로 이집트가 이란의 시아 울라마정권이나 에르도안의 네오-오토만 터키처럼 ‘이슬람 정체성’을 가진 (주권) 국가로 이행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서구 세속민주파는 자신들도 ‘주권’ 국가를 염원하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지만, 무슬림형제단 입장에서 봤을 때, ‘서구식 민주주의’ 자체를 ‘다양성’ 혹은 ‘다원화’를 내세우며 민주적인 척하지만 그게 사실은 “민주적 경쟁”이라는 허울 아래 다양하게 떠드는 놈들이 우왕좌왕 서로 멱살 잡고 싸우게 해놓고 국가의 중심인 ‘국본(國本)’ — 그들의 경우에는 ‘이슬람’ — 이 들어서는 것을 교묘하게 차단하는 과두통치 테크놀로지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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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근대인’으로 주조된 우리는 ‘신정정치’는 ‘퇴행’이자 ‘궤도이탈’이며 ‘시대착오’로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상식처럼 배우며 살아왔다. 따라서 신정정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악’에 해당한다. 그래서 2012년 무슬림형제단 대통령 후보 모하메드 무르시가 이집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위의 4자 세력은 모두 절망했고, 무르시를 축출하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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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시는 분명 2012년 대선에서 자유정의당 후보로 출마해서 51.73%의 득표로 당선된 ‘합법적 대통령’이다. 그런데 당선으로부터 1년이 지난 이듬해 2013년 6월 30일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일에 ‘이집트 전역의 수많은 시위자’는 거리를 점령했고, 무르시의 ‘즉각적 퇴진’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위의 4자 세력 중 (1), (2), (3)이 제시하는 이유는 ‘시꺼먼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니까 패스하고 (4) 번 세력인 서구식 세속민주파의 논리를 살펴보면, 일단 서구 민주파의 공통점은 ‘세속적이고 온건한 개혁주의(혹은 급진주의) 노선’을 원했다. 그러니 “이슬람 원리주의 무리”가 권력을 장악해 나라를 온통 이슬람 색채로 물들이려고 하고 있으니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아마도 당시 이집트 국민의 상당수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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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2013년 7월에 압둘파타흐 시시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벌어져 무르시를 축출했을 때 위 4자 세력은 모두 기뻐했다. 그리고 무바라크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고 마치 유튜브 중간 광고처럼 잠시 무르시가 출현했다가 사라지고 씨씨 군사 철권통치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이집트 총독 정치는 시즌2를 개막하게 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축복과 격려를 받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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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는 1981년 의회를 해산시키기로 한다. 그 결과 무슬림형제단은 의회에서 퇴출당한다. 그러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을 찾아 나서는 게 그들의 전략이다. 따라서 무바라크와 무슬림형제단과의 ‘전쟁’은 의회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 전역에 24개 조직과 300만 회원을 가진 ‘직업별 신디케이트(professional syndicate)’였다. 무슬림형제단은 직능별 이익단체와 흡사한 이 직업별 신디케이트를 장악하여 집권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을 포위하게 된다. 의회에서 쫓겨나니까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정치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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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바라크는 직업별 신디케이트 선거법을 좀 까다롭게 바꿔보기도 했으나 별 효력은 없었고, 또다시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을 능가할만한 조직력과 대중 동원력을 갖춘 정치세력은 없다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크고 작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릴 수 있었으며 우월한 세력으로 권력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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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바라크 세력은 정적들의 지속적 성장을 대책 없이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을 찍어 누를 교묘한 ‘계략’을 입안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들의 성장을 내버려뒀다가는 아무리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신들 뒷배를 봐준다고 해도 내부로부터 (군사) 정권이 잠식당하고 급기야 붕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공포감에서 해방될 ‘정치적 한방’이 절실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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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1992년 ‘살사빌 사건(Salsabil affair)’이 터졌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무바라크는 무슬림형제단에 맹폭을 가하기 시작했다. 즉, “그래, 니들이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라는 관망하는 ‘억제 정책(a policy of containment)’에서 뿌리 뽑기 식 ‘제거 정책(a policy of elimination)’으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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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사빌 사건이란 무엇인가? 이게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다. 살사빌(Salsabil)은 컴퓨터 회사였는데 이 회사가 ‘우연히’ 이집트 군부대에 업무용 컴퓨터를 대량으로 납품하는 수주 계약을 ‘운 좋게’ 따내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살사빌이 군에 납품한 컴퓨터에 해킹 소프어웨어가 깔렸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그리고 이집트 경찰 당국은 이 회사가 ‘알고 보니’ 무슬림형제단 회원의 소유였으며 그들이 이집트 정보부와 군부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진짜로 그런 건지 아닌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무바라크가 ‘통제 불능한’ 무슬림형제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라는 견해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정부 발표는 그랬다(‘통진당의 추억’을 상기해보면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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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살사빌 컴퓨터 회사의 직원 43명 모두는 경찰에 붙잡혀 간다. 게다가 이집트 경찰은 무슬림형제단 지도자 중 한 명인 카이랏 알-샤터(Khairat al-Shater)자택에서 「권력 이양 Empowerment」이란 제목을 가진 13쪽짜리 문서도 “발견”하게 된다. 이 문서는 무슬림형제단이 “국가전복”을 획책한다는 혐의를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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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문서는 무슬림형제단 내부 회람용 공개 문서일 뿐이며 그 존재 또한 비밀에 부쳐 있지도 않았다. 문서 내용은 무슬림형제단의 점진적 권력 장악을 위한 이런저런 방안을 싣고 있었다.

정당 정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존재 목적은 ‘권력 획득’이다. 그것은 정치학의 ABC다. 다만 권력 획득의 방법이 폭력적이지 않아야 하고 — 자본주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과 자본과 국가가 한몸이 되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엽기적 폭력은 일단 논외로 치고 오직 ‘비폭력적 선거’를 통해서만 권력에 접근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전제에서 — 헌법을 준수하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합법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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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무바라크 암살 시도 사건이 발생한다. 무바라크는 이를 무슬림형제단이 연루된 것으로 파악안다. 그래서 무슬림형제단이 그해 있을 선거에 대비하여 대책 회합인 제1차 슈라 위원회 모임(Shura council meeting)에 난입하여 참가자 전원을 체포하여 ‘군사 재판’에 회부해 버린다. 민간 법정이 아닌 군사법정에 그들을 세우는 이유는 어차피 민간법정은 ‘증거 불충분’으로 그들을 방면해 줄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군사법정은 끌려온 62명에게 모두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다섯 명에게는 5년을 그 나머지 참여자들에게는 3년을 각각 구형했다. 이때부터 무바라크 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의 주요 인사를 ‘조용히’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방법을 통해 그들 세력을 꺾으려 노력했다. 무바라크는 2000년 의회 선거 전까지 이 방식을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이에 굴하지 않고 2000년 선거에 150명 후보자를 내어 17석을 얻는, 괜찮은 성적을 낸다. 이로써 1995년 이래 진행한 무바라크의 근절 계획은 실패로 드러났다. 의회에 입성한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의회 최대 야당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그들은 1987년부터 2010년까지 종교적 슬로건을 사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슬로건은 “이슬람이 답이다!”였다. 그리고 2000년부터는 무바라크 정권의 신세대 정치가들인 아흐메드 에즈(Ahmed Ezz)나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 그리고 많은 이들의 끝없는 부패사건이 노출되면서 대중의 분노는 점점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바라크가 그의 아들(가말 무바라크)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이집트 국민들은 민심이 더는 무바라크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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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중적 분노는 무슬림형제단과 기타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강도 높은 반부패 정치투쟁과 대통령 세습에 ‘사이다 비판’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연일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가말 무바라크는 분노했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고 솔직한 언사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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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미국은 무슬림형제단이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온건 이슬람’에 불과하니 잡아 족치는 방식으로 단순무식 탄압 일변도의 정책보다는 이집트를 부드러운 “민주주의” 제도에 기반을 둬 통치하라고 주문했다. 권력 세습은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2005년 선거가 다가왔다. 무바라크는 국내외에서 일고 있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기 위해 이제까지 시행했던 ‘비밀선거’ 방식이 아닌 ‘공개선거’를 강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선거법 ‘개악’을 단행했다 그렇게 하면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끽해야’ 30석 이내 의석을 차지하는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는 정보부의 사전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불같은 분노에 직면한 정부는 이를 철회했으며, 정상 절차에 의해 투표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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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의회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총 의석 수 454석 중 집권 국민민주당(NDP)은 311석을 차지해(68.5%) 1등을 차지했다. 2등은 무슬림형제단(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 88석을 차지했다. (19.4%) 나머지 45석은 기타 군소 정당들이 나누어 차지했다.

얼핏 보면 무슬림형제단이 19.4%에밖에 득표하지 못했으니 저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별의별 선거 부정이 다 동원되고 선거 전에 수많은 무슬림형제단 출마자들이 극도의 탄압을 받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 정도 성적을 냈으면, 과반수 확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무소속이 아닌 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거를 했더라면 아마 두 배에 이르는 40% 정도 득표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무바라크의 예상을 뒤엎고 제도권 정당의 고위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하고 무슬림형제단의 약진이 계속 이어졌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무바라크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 누적과 집권세력의 부패에 대한 환멸이었고 둘째는, 피폐 일로를 달리는 서민경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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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005년 의회 선거 결과는 무슬림형제단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이집트 당국은 무슬림형제단을 대량으로 체포하기 시작한다. 이런 혹독한 시련은 다음 의회선거가 있을 2010년까지 지속하였다. 무바라크는 최대의 정적이며 “정국불안”을 일으키는 (악의) 축”이었던 무슬림형제단을 뿌리 뽑고 싶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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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2010년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말이 좋아 선거지 ‘완전히’ 무바라크 일당의 ‘부정 페스티벌’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행한 ‘3.15 부정선거’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선거를 통해 ‘연로한’ 무바라크가 이듬해 2011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아들 가말(Gamal)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는 초석을 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이길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절박함 때문에 많은 ‘무리수’를 둔다. 게다가 무바라크는 2005년 의회에 대거 입성한 무슬림형제단 의원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언론에 연일 정부 비판과 권력자들의 추문을 쏟아내는 탓에 심사가 몹시 뒤틀려 있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즉 이번 선거를 통해 이 꼴도 보기 싫은 ‘무슬림 비판충들’을 모두 한큐에 ‘박멸’ 시켜 버리고 싶은 욕구 또한 강렬했다. 원래, 보기 싫은 사람 자꾸 보면, 마음에 그늘이 생겨 제 명대로 못 살고 일찍 죽는다. 무바라크 또한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천수(天壽)’를 누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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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2010년 의회선거 결과가 나왔는데….

무바라크당(국민민주당, NDP)이 총 518석 중 473석을 차지했고(91.2%), 무슬림형제당은 ‘꼴랑’ 1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5년의 88석에서 1석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건 뭐…. 할 말이 없다. ㅠㅠ

도대체 어떻게 선거를 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온단 말인가? 그 비결이 알고 싶다 선거 후 무바라크는 기쁨에 도취해 ‘룰루랄라’ 하고 있다가 이듬해(2011년) 불어 닥친 “아랍의 봄”으로 아들 가말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말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30년 철권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무바라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스 르 르 . . . . (숲 속에서 뱀이 어디론가 사라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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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권 시기를 돌이켜보면,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은 가난해도 너무 가난하게 살았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빈곤이 ‘애굽 땅’을 뒤덮어도 누구 하나 백성을 거들떠보거나 돌봐주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하게 태어나서,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엉성한 이슬람 무늬가 그려진 싸구려 관 속에 드러누워 묘지에 매장되는 것으로 초라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의 열혈 무슬림형제단 단원들이 가슴 아파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형제, 자매들의 ‘슬픈 가난’과 우격다짐으로 주입되는 사탄적 서구 문화가 주는 ‘영적 몰락’이었다.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꼭 이렇게 가난하고 불행하고 흉물스럽게 살아야 하는가…. 이집트가 뭐가 그리 못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이집트에 주어진 숙명이란 말인가……? 이렇게 물질적으로 비참하고 영적으로 썩어 문드러져 짐승같이 고통스럽게 살다 죽으라고 알라가 우리에게 명했단 말인가……? 분명 그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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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에 대한 믿음 아래 서로를 위하며 비록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온 백성이 생계 곤란에 쩔쩔매지 않고 저마다 잘하는 일에 몰두하며 ‘나의 발전이 사회의 풍요로 직결되는 길’은 정녕 없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정치에 눈을 돌린 것이다. 정치가 좋아서, 남 보란 듯이 권력 한 번 멋지게 휘둘러 보려고, 아니면 과격한 정치투쟁이 체질에 맞아서 그들이 무바라크 살인독재 정권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게 아니다. 고민, 고민, 고민하다가 그들은 문제 해결의 본질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그게 바로 ‘정치 참여’였다. ‘권력의 장악’이었다. 종교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돼먹지 못한 ‘공화 종교’의 악성 교리가 그들의 사고를 ‘전족’처럼 묶어둘 수는 없었다. 가진 게 이슬람이니 이슬람으로 해결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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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의 레닌’인 이집트인 사이드 쿠틉이 저술한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무슬림 형제단의 사상적 토대를 서술한 책이다. 이슬람이 제시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는 1966년 ‘국가전복기도 및 선동죄’로 교수형에 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어떤 성격의 국가를 어떻게 전복하려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선동했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책을 반드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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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