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완정 시론

I 이집트 정치 단상 (1) I /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i)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무슬림형제단 /

신현철/편집위원

 

I 이집트 정치 단상 (1) I

/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i)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무슬림형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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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풍운아”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 아이콘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시키고 아랍세계 ‘스타’가 되었다. 58년에서 61년간에 걸쳐서 나세르 이집트는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지금의 시리아와 합쳐 ‘아랍연합공화국’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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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주의”라는 정치 용어도 생겨났다. 아랍 토양에 맞는 ‘신토불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세속주의’를 가장 하단에 깔고 그 위에 ‘범(汎)아랍주의’와 ‘반(反) 시오니즘’과 ‘비(非)동맹주의’ 등의 벽돌을 쌓아 만든 ‘모자이크 이념’이었다. 사유재산은 인정하되 국가 공공부문을 확대하는 경제모델을 추구했다. 원래 ‘아랍 사회주의’의 정통 계보는 ‘바트당’이 가지고 있었다. 바트당은 한때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세속주의 정당이었다. 시리아의 현 아싸드 정권은 바트당 집권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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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집트의 나세르가 냉전 시대 ‘중동정치의 핵’으로 떠오르면서 얼마나 ‘폭풍질주’ 했던지 당시 소련 이론가들이 이집트를 보며 자본주의 단계를 지루하게 거치지 않고 곧장 ‘비자본주의적 사회주의’의 길로 스피디하게 내달릴 수도 있다는 ‘하이패스 이행론’을 추가로 만들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니까 당시 나세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뢰를 받았던 중동정치의 ‘자이언트’였던 셈이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나세르는 1967년 아랍의 맏형 이집트가 중심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동생들을 이끌고 이스라엘에 대항해 벌인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중동에서 ‘나세르주의’는 급강하 추락을 맞이하게 된다. ‘추락’하는 것이 있으면 동시에 ‘발흥’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생멸(生滅)’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세속주의를 표방하던 나세르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에 가려 주변에 찌그러져 있었던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이 기지개를 켜고 발흥하여 도약의 기회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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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그의 친구 사다트는 못다 한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소련의 도움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 시리아와 한팀이 되어 이스라엘에 대항해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을 수행해보지만, ‘초반의 승리’와 ‘후반의 패배’라는 역전패를 당하게 된다. 사다트는 이 패배를 기점으로 중동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의 분리된 국가가 아니라 미국을 후방기지로 둔 ‘전방기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즉, 사자떼와도 같은 미국이 이스라엘 뒤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고 있는 한, 반제반시오니즘 범아랍주의 세속주의 정치세력은 아무리 서로 단결하고 준비를 잘한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결코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을 전쟁으로 증명한 것이 바로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미국이고 미국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기려야 이길 수가 없었다. 자웅동체가 한 몸인 엽기 생명체 혹은 남녀가 한 몸인 아수라 백작 같은 괴물을 아랍이, 그것도 아랍의 일부 세력에 불과한 세속주의 세력이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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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다트는 미국(카터 대통령) 주도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이스라엘과 맺게 되는데, 이 때문에 그는 2명의 이슬람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 협정은 아랍 인민에게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이 암살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의명분이었다. 사실 사다트에 이르러서 이집트는 그동안 자신이 떠맡아 왔던 반제반시오니즘의 전투기지이기를 멈춘 상태였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매년 거대한 경제, 군사 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이집트 군부의 비대화와 소수 과두 패밀리가 모든 국부를 차지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물질적 기반이 된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돈을 만지게 된 국내 상층 피라미드 계층은 이집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제반시오니즘의 과거를 ‘청산’하게 된다.

이제 그 짐은 호메이니 이란과 시리아가 대신 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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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트가 죽고 나서 권력은 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에게로 돌아갔다. (1981년 10월 14일) 무바라크는 취임 초기에 ‘포용’과 ‘통합’을 강조하며 그동안 억눌려 왔던 이슬람세력,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 소속 정치범들을 대거 사면하고 무슬림형제단에 정치적 자유를 부여해준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은 와프당과 연합해 의회에서 8석을 얻어내는 성과를 낸다. 이는 1928년 이집트에서 창설된 무슬림형제단을 나세르 정권이 불법화한 1954년 이후 30여 년 만에 얻은 값진 ‘정치적 부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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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80년대 중반에 이집트에는 “경제위기”가 찾아와 이집트는 분노의 폭동과 혼란이 가득한 아수라장이 된다. 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부채 중심의 경제’ 때문이었고 특히 빵[식량] 보조금 철폐와 같은 IMF의 ‘황당한’ 요구들은 대중의 분노와 시위를 ‘일부러’ 촉발해 한 나라를 ‘카오스’로 몰아넣는 수단으로 쓰이며, 따라서 경제정책을 통해 국가통합에 파열을 내고 온전한 경제성장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다분히 ‘사회공학적 시한폭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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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정치경제를 보면 이집트 또한 세계자본주의 경제에 편입된 이후 벌어지는 경제적 파탄에서 예외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무슨 공식처럼 ‘모든’ 국가에서 같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만성적인 무역적자, 재정적자, 해외부채의 폭발적 증가와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 그리고 이어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의 구제금융과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무바라크는 국제 금융기관들이 부과하는 혹독한 긴축재정을 받아들여 시행하는데, 이는 사회간접자본과 공기업의 대규모 민영화, 각종 정부보조금 폐지, 사회복지지출의 대폭적 삭감, 엄격한 금융정책, 그리고 수출과 외국인 직접투자에 의존하는 경제성장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재편은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궁핍과 실업의 지옥’을 국제자본과 국내 과두들에게는 천문학적 부의 축적을 선물해 준다.

알고 보면 다 지능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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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무바라크 일족과 국가권력의 자장 안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1)‘민영화’라는 수단과 (2) 해외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무한정 대출과 (3) 산업 장악을 위한 독점적 특권 배정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수 십 마리 안겨주는 것과 같다. 재벌이 되지 않으려야 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재산 몰아주기 새판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적 약탈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어 버린 이런 ‘통 큰 돈 벌기 방식’이 이집트에서는 80년대 중후반에 상륙했다. 이런 돈 몰아주기 방식에 적합한 정치 체제는 무엇이겠는가…? 답은 오직 하나! 미국이 뒷배를 봐주는 “권위주의적 과두형 독재국가”다. (2011년 “아랍의 봄”이 깨뜨리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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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제적 폭풍우 와중에 무슬림형제단은 1987년에 시행될 의회선거에 대비해 과거처럼 와프당에게 선거연합을 그들이 거부한 탓에 노동당이나 다른 리버럴 세력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총 60석 중에서 36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무바라크는 이런 결과에 위협을 느끼고 무슬림형제단의 약진을 우려하게 된다. 무슬림형제단은 서구정당의 외곽 지원조직에 비견할 수 없다. 잘하면 지지하고 잘못하면 등 돌리는 그런 수준의 개인주의적 에토스(ethos)가 아니다. 우선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끈이 그들을 묶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자선사업과 무료 교육사업을 통해 기층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배고프고 굶주릴 때 옆에 다가와 ‘빵’을 건네주며 격려하고 서로가 알라를 믿는 무슬림 형제, 자매임을 확인시켜 주는 이들에게 ‘정치적 충성’은 그야말로 필연적이다. 신자유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서로를 보듬으며 피보다 진한 연민으로 서로를 돌봐주는 그들에게 누가 충성을 하지 않겠는가? 친족도 하지 못하는 선행을, 그들은 바로 그것을 몸소 실천한다. 그로부터 이들은 ‘천 년 동안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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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