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I “유대주의 정신”의 범위 설정 문제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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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학술적 논의 없이 단박에 유대적 사유방식의 전모를 파악할 방법은 프랑스 작가 에르비 리쎈(Hervé Ryssen) — 아래 사진 참조 — 이 쓴 『유대인 이해하기, 반유대주의 이해하기 Understanding the Jews, Understanding anti-Semitism』(lulu.com, 2015)를 읽는 것이다.(ISBN 978-1-312-390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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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 출판된 에르비 리쎈(Hervé Ryssen)의 여섯 권의 저서를 88쪽으로 간단요약한 다이제스트 책자인데, 내 보기에 유대주의 정신의 기원에서부터 현실의 구체적 작동 양태에 이르기까지 ‘유대적 사유 패러다임’에 대해 그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책 제목을 『유대인 내면의 풍경』으로 바꾸고 싶을 정도로 유대인의 ‘굴절된’ 내면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그 어떤 책도 그의 설명을 절대로 따라잡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초등 고학년들이 읽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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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쎈은 ‘목적의식적으로’ 제작되어 유포되는 헐리웃 영화들을 끄집어내 영화가 주입하려는 ‘유대적 메시지’를 분석하는 데 ‘도가 튼’ 비평가다. 대중문화 코드가 인간에게 그나마 잔존해 있는 ‘덕성’과 ‘영성’을 낙태시키는 데 쓰이는 ‘의식 살상무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배문화가 대중에게 그릇된 정보나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차원적 역할을 넘어 인간 의식의 외연(外延) 확장 가능성을 질식시키고 ‘사유의 척추’를 상실한 ‘파블로프 개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은 ‘초월(超越)’과 ‘초극(超克)’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몸짓에 침을 뱉으며 ‘비현실적’이라는 낙인을 찍고 혐오와 조롱을 한껏 퍼부으며, 오직 약삭빠름과 저속함과 상스러움만이 ‘현실적이며’ ‘유머스러하며’ 그것만이 ‘상식’이고 ‘미덕’이라고 칭송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공인화시켜왔던 근대 물질세계의 수감자들이 ‘자유로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빠삐용 교범’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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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주체적으로’ 문화를 소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해가며 ‘특정 관념’(유대 정신)을 반복적으로 주입받는 지금의 문화 소비 시스템의 최고 정점에는 영화나 TV드라마의 ‘의심스런’ 콘텐츠가 자리잡고 있다. 리쎈은 ‘오락’과 ‘감동’이라는 이면 속에 정교하게 배치된, 대중의식을 특정 선입견으로 고착화시키는 미시 회로를 고배율로 확대시켜 보여준다. 개별적 회로뿐 아니라 회로의 ‘총체적 구조’까지도 짚어준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허공에 붕 뜬’ 이론을 듣고 나서 느끼는 현실 유리로 인한 공허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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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 집필을 위해 다량의 자료를 참고문헌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수 세기 동안 그리고 여러 대륙에 걸쳐 자신들 삶을 영위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특유의 ‘코스모폴리탄식 사유구조’가 가진 놀라운 동질성을 파악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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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적 사유체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모세 오경인 (1)토라(Torah)와 그 해석인 (2)미드라쉬(할라카와 학가다), (3)탈무드(미쉬나와 게마라) (4)토셉타와 (5)신비주의 카발라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헌들을 모두 읽고 이를 비평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책이 번역되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익혀 난해한 문장도 척척 독해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는 언어 학습의 수고도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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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저명한 유대 랍비들조차 이 많은 저술들을 다 읽지는 못한다. 그저 일부만 읽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전체 분량이 소형 트럭에 가득 싣고도 남을 정도이기 때문이다(적재 요령에 따라 트럭 용량이 상향될 수도 있다).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 분량인지 아는 이는 오직 ‘열혈랍비’ 몇 명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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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이것들을 빠짐없이 다 읽었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제2단계는 유대주의 정신이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아랍 제국의 구체적 역사 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종교이론의 범위를 넘어 역사학 공부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3단계는 트럭에 담긴 경전과 주석서로부터 파생된, 근현대 유대인 저술가들의 각종 세속적 ‘. . . 이즘’ 관련서를 읽고 ‘. . . 이즘’과 유다이즘의 ‘연관성’을 규명해야 하는 작업이 놓여 있다.
그야말로 ‘무한광막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말만 들어도 질리는 이 작업을 모두 수행한 유대학 연구자가 지구상에 존재할까? . . . . . . (침 묵)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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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대주의 정신”이 무엇인지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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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대주의 정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마도 (1)‘시오니즘(Zionism)’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유다이즘을 시오니즘으로 등치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19세기 중후반에 글로벌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들에서 유대인 대다수는 오랫동안 거주해 온 지역과 국가에 그냥저냥 적응하고 동화해서 눌러 살기를 원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되는 법이다. 뭐 미쳤다고 지금 살고 있는 정든 고향(대부분 화려한 도시들)서 보따리를 싸서 척박하기 짝이 없는 ‘시온(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서울 강남 사람들한테 강원도 산간 오지에 가서 살자고 졸라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에겐 그런 이주를 결심케 하는 문화적, 경제적 유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테오도르 헤르쯔 류의 시오니즘파는 그래서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했다. 정통 랍비들 이야기를 빌면, 그래서 시오니즘 소수파는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찌와 비밀리에 밀약해 유대 동포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여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전유럽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 양떼 몰 듯 유대인 동포들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함으로써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시온(팔레스타인)으로 가지 않고는 못 버티게끔 만들자는 ‘악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 시온주의자들 자신의 입으로 떠벌이는 말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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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울트라 정통 랍비들’ 또한 군대와 영토를 갖춘 ‘유대국가’ 건국의 당위성이 유대 경전과 율법서 어디에 적혀 있냐고 강력하게 따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국가 만들자 주의’인 시오니즘을 유대정신 본류에서 벗어난 ‘족보없는 괴물’로 간주했다. 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과 세계 각지에서 온갖 굴욕과 탄압을 받으며 ‘이스라엘 국가 무효화 투쟁’을 벌이고 있다. 네탄야후를 ‘사탄야후’라고 부르며 빼앗은 팔레스타인 땅을 원 주인인 아랍 토착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유대 민족은 ‘야훼의 분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통곡하듯 외치고 있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시오니즘은 유대 정신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유전자 돌연변이 괴물 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유대주의 정신”은 (2)유다이즘에서 시오니즘을 뺀 부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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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대주의 정신”을 ‘유다이즘 전체’로 보는 입장도 있다. 정통이 되었건 이단이 되었건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모든 유대 지파들이 동일 혈족의 사상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모세오경인 토라는 그냥 얼굴마담으로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랍비들이 토라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토라와 정반대되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기독교 영성을 파괴하기 위하여 유물론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시작으로 “지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을 실천해 메시아를 불러내자는 능동적 메시아니즘”인 사바티언-프랭키즘(Sabbatean-Frankism)을 거쳐 시오니즘 같은 이단 괴물로 연결되는 그 모든 족보가 유다이즘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처럼 “유대주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고찰하기 위해서 선행해야 하는 작업조차도 만만치가 않다.
다음 글에선 “유대 스피릿” 혹은 “유대주의 정신”을 ‘유다이즘 전체’로 보는 입장을 취해 그 특징을 나열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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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사람 1명, 밤, 근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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