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I 영화 ‘독전(督戰)’과 영국내전의 경제적 핵심 I
/ 잉글랜드의 ‘이 선생’은 누구인가? 금은괴 브로커를 추적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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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개봉한 이해영 감독의 「독전」(부제: ‘믿는 자 believer’)이란 영화가 있다. 처음에 한자(漢字) 표기 없는 우리말 영화 제목만 뜩하고 보면 ‘독한 놈들의 전쟁’을 의미하는 ‘독전(毒戰)’ 인가부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 영화의 홍콩 원작 영화의 제목 또한 「마약전쟁: 독전(毒戰)」(2013)이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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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 스토리 퍼즐을 맞추다 보면 영화 제목이 ‘독한 놈들의 전쟁’인 ‘독전(毒戰)’인 측면도 있지만 분명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설적 마약킹인 ‘이 선생’(류준열 분)이 무력한 ‘내부고발자’인 것처럼 가장해 경찰에 ‘잠입’해 이들을 가지고 놀며 자신을 사칭하는 다른 마약상들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으로 잔인하게 제거해 나가는 스토리 라인이 돋보인다. 이 때문에, 영화 제목을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줌>이라는 뜻을 가진 <독전(督戰)>으로 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가 주연인지 조연인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기량이 뛰어난 ‘모든’ 배우들의 ‘미친’ 연기력은 잔인한 악귀들의 전쟁터 한복판에 내가 ‘비무장’으로 떨어진 듯한 공포감까지 안겨 주었다. 영화가 그만큼 ‘살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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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독전(督戰)>으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움을 하게끔 ‘판’을 크게 벌여 놓고 이를 감독-조율하는 것은 물론 사기까지 북돋워 주는 <독전(督戰)>의 정치 기법은 영화보다는 현실 역사에서 더 즐비하게 발견되며 무엇보다 일관되게 관철되는 ‘칼’ 법칙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논의 중심인 17세기 초중반 유럽 잉글랜드에서도 <독전(督戰)>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의회에 ‘잠입’해 왕 주변 걸출한 인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죽여나가고 결국에는 찰스 1세 목까지 따간 잉글랜드의 ‘이 선생’은 누구인가? <독전(督戰)> ‘이 선생’인 류준열처럼 직접 경찰 내부에 ‘잠입’한 것은 아니지만 멀리서 ‘원격 통제’를 해가며 의회와 왕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게끔 판을 벌여 놓고 최종적 승리를 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추적해야 할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선생’인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이 선생’을 찾아내어 불법 거래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시방세계는 고리대금 수전노의 ‘불법적’ 금융과 ‘불법적’ 무기팔이와 ‘불법적’ 원유 독점과 ‘불법적’ 마약팔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 ‘4대 핵심 비즈니스’를 장악하면 세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 중에서 가장 역사가 긴 것은 금융과 화폐 비즈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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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애쓸(David Astle)의 『바빌로니아의 재앙 THE BABYLONIAN WOE』(David Astle; 1975) (pp. 112~118)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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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혁명”은 기본적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근거지를 둔 국제 금은괴 브로커들(international bullion brokers) 작품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들은 크롬웰에게 무기와 군수품과 용병을 비롯한 찰스 1세의 왕정을 전복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혹시 왕과 상호협력해 윈윈하는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왜 굳이 왕과 의회는 극한적 적대 관계를 형성하며 유혈내전과 국왕시해로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찍게 되었을까? 내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거의 모든 분쟁의 중심에 양보할 수 없는 ‘금전 관계’가 또아리 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생활 상식’으로부터 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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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당시 유럽의 금은괴(bullion)의 흐름도(flow chart)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금은괴(bullion)는 이들(international bullion brokers)에 의해 남아프리카(South Africa)와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 등지로부터 일단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유입되어 한편으로는 무역상들의 대차[수지]계산(trade debit balance)에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에 대한 구매 대금지급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금은괴(bullion) 대부분은 이탈리아 베니스와 제노바로 흘러들어 갔고, 이것은 다시 런던과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렇게 북유럽으로 꾸준히 유입되는 금은괴(bullion)는 과잉 공급으로 치달았으며 점차 그 분량이 누적되어 근대 은행업의 성장을 촉진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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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금은괴 흐름은 국제 금은괴 브로커들(international bullion brokers)과 왕(kings)과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금은괴가 과잉 유입되면서 일차적으로
(1) 국내 경제에 ‘인플레’를 유발해 상품가격을 상승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일으켰으며, 또한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2) 과잉 자금이 그 투자처를 찾기 위해 ‘은행업의 팽창’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왕의 처지에서 보면,
(1-1) ‘부패한 경제 자문들(venal advisors)’이 국가재정을 쥐락펴락하면서 더는 재정 균형을 맞추지 못하여 국가재정은 상시적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2-1) 왕과 측근들은 은행가들(bankers)이나 사적 금융업자들(goldsmiths)의 활동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융업자들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역할이 얼마나 심대한지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피상적 이해에 그치는 수준에 불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메커니즘 자체를 이해하고 있질 못하니 보니, 금융업자들의 금은괴 유입 활동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고, 설사 왕들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의 유입 활동을 허락하는 경우에 조차도 그들의 막대한 이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적당한 제도적 방안를 찾아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과세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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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괴 유입이 잉글랜드 경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상인들과 중산계급 시민층은 암스테르담의 금은괴 브로커들(bullion brokers)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금융(finances)에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고, 그들이 상거래를 통해 소유하고 있었던 ‘증서(receipt)’가 화폐 역할을 하며 유통되는 관계로 이것이 혹시라도 잘못되거나 실물가치를 뒷받침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게 되면서 그들은 당시의 ‘편리한 금융 관행’에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래서 상인들과 잉글랜드 중산계급 시민층은 ‘은행 독점(Banking monopoly)’을 간절히 염원하던 <국제 금은괴 거래상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소지한 증서가 ‘정크(junk)’로 전락하여 재산상 손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는 ‘왕권의 이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왕은 ‘신으로부터 선정된 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역이든 금융이든 그 무엇이든지 왕 이외 특정 신민 집단에 영구적으로 ‘독점’을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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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자기 권력의 원천이 (1)‘군사력’과 더불어 (2)‘화폐 창조와 발행에 대한 독점(monetary creation and emission)’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존재하던 금융업자들이 요구하는 ‘독점’에 대해 지극히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 금융업자들 처지에서는 자신들 영업행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중세적 권력구조’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구속 조끼’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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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잉글랜드의 경우, 1539년 헨리 8세(Henry VIII) 때 폐지되었다가 부활하여 재도입된 ‘왕실 환전소(Royal Exchanger) 제도’는 개인 금융업자(goldsmiths)와 그들의 주인인 금은괴 브로커들(bullion brokers)에게 거대한 금융수익 노다지를 왕이 “강탈”해 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를 뒤엎을 ‘정치적 힘’은 없었다. 자신들에게 돌아와야 할 막대한 수입이 전부 왕에게로 이전되는 이 “불합리한 독점”을 그저 시무룩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왕실 환전소(Royal Exchanger)는 토마스 그레샴 경(Sir. Thomas Gresham)의 조언에 따라 시행되었는데, 이는 국내 환전 수익을 ‘국유화’하는 조치로써 국가재정을 정상화하기 위한 재정개혁 일부로 시행된 조치였다. 이로써 국제 금은괴 중개업자들(bullion brokers)은 ‘정량주화(coin)’를 만들어 이를 국내외에 유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막대한 화폐주조 사업 수익이 증발하는 것을 계속 그냥 멍하니 손 놓고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행동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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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황금알을 낳는 비즈니스 영역을 왕으로부터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시티어브런던(The City of London)의 대부업자들(= 금은괴 브로커 겸업)은 국왕에게 대출을 ‘거부’했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찰스 1세는 1640년 7월에 당시 런던탑(the Tower of London)에 있던 ‘조폐국(MINT)’에 런던 상인들이 예치해 신탁되고 있던 13만 파운드 가치의 은괴를 8%의 이자배당금 지불을 약속하고 ‘압류’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동년 8월에는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 또한 국왕에게 대출을 거부하는 ‘적대적 반응’을 보이자, 코팅톤 경(Lord Cottington)이 그 회사로부터 후추와 향신료를 몰수해 시장 가격 이하로 팔아치우는 사건이 발생했고, 물론 이때도 원금과 이자를 향후 지불한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물건을 가져갔다. 이처럼 당시 런던에서 활동하던 국제 대부업자들은 — 런던 상인세력을 자기편으로 하면서 — 왕으로 인해 자신의 천문학적 이윤 획득이 방해받고 있음을 정확히 인식하며 ‘불만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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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올리버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은 이들의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되어 의회파를 장악해 잉글랜드 내전을 본격화시킨다. 왕과의 타협과 화해를 말하는 내부 세력을 정치적으로 계속 숙청해 가면서 급기야 1649년에 이르러서는 찰스 1세를 단두대에서 처형시킨다. 이로써 양자 간 경제적 갈등을 둘러싼 투쟁에서 국제대부업자들(=금은괴 브로커들)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둬 내전은 종결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가톨릭 세력을 학살하고 재산을 강탈하는데 전력하면서 그곳에서 주민들을 납치해 백인 노예로 서인도제도에 팔아 치운다. 이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상술하겠다(아래 그림이 그 당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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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과 관련해 말한다면, 잉글랜드에는 17세기 중반까지는 예치를 위한 은행이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 잉여 금화를 ‘국왕 조폐국’에 맡겨두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로써는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인 1638년에 찰스 1세는 국가재정에 충당키 위해 금화 20만 파운드라는 거액을 ‘대출’ 형식으로 몰수한다. 비록 나중에 왕은 금화를 예치한 상인들에게 대출금을 이자와 함께 정확히 반환했으나 이 일로 인해 런던 상인들은 국왕의 조폐국에 자신의 금화를 맡기는 행위를 위험천만하게 받아들였고 이후부터는 사적 금융업자 금고에 예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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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왕에게로 수익이 이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왕이 국가재산을 ‘사유화’해서 흥청망청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금융업자 시각과 입장에서 대필 된 대부분 역사책에서는 ‘중세의 왕’을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독재자”쯤으로 여기게끔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의도된 ‘중상모략’이다. 실제로 왕에게 이전된 수익은 국가재정에 충당되어 공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찰스 1세 치세 말기 퓨리턴 의회가 그토록 왕에게 ‘딴지’를 걸며 사사건건 방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해산 후 찰스와 그의 충직한 신하들은 독자적으로 ‘군사개혁’ 및 ‘재정개혁’을 시행해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찰스 1세는 유럽 최고의 군주는 아닐지언정 평균 이상 통치력과 리더쉽, 현명함과 무엇보다 덕성을 가진 군주라는 게 17세기 영국사 연구자들의 일반적 평가다. 물론 의회를 장악해 국제 금융업자들을 위한 전위부대 역할을 떠맡았던 강성 퓨리턴들에 “혁명적”이라며 찬사를 보내며 후한 평가를 하는 ‘덜 떨어진’ 역사학자들이나 ‘이론에 현실을 꿰맞추는’ 역사학자들과 ‘덩달이 합창단원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봉건적”인 것은 모두 폐기의 대상이라는 그들의 ‘선험적 도그마’는 역사적으로 벌어진 객관적 사실조차도 볼 수 없게 만드는 괴력을 보여준다. 눈은 멀쩡하게 뜨고 있되,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靑盲과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 ‘해석’에 앞서 역사적 ‘사실’부터 챙기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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