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I 서구 근대 “시민혁명”의 해부: “그런 건 애당초 없었다!” I
/ 기획된 혁명 제1편: “영국 혁명” ––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과 ‘더치 커넥션(Dutch Connection)’ /
1
우리는 서유럽 근대사에 상공 시민계층이 주도했던 “시민혁명” 혹은 “부르조아 혁명”이 있었다고 배워왔다. 우리는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상하는 신흥 부르조아계급이 낡은 봉건적 생산관계의 질곡을 무너뜨리고 한층 더 발전된 단계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만개시켜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진보를 이룰 수 있게 해 준 정치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2
“혁명”이 난무하는 서구 역사의 스펙타클한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우리는 역동적 꿈틀댐으로 “발전”과 “진보”를 향해 성큼성큼 내디뎠던 서유럽의 역사를 은근히 부러워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서구처럼 발전과 진보의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은 거야? 정말이지 ‘멋대가리’ 없는 역사야! 고리타분한 조상들은 그저 유교 경전이나 암송할 줄 알았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고 어물쩡대다가 이웃 나라에 침략이나 당하고, 수십 년 곤욕을 치르는 식민지가 되어 버렸잖아! 이게 뭐야? 너무 수치스럽고 창피한 역사 아냐? 우리 민족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너무 한심한 거 아니냐! 비록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수치스럽고 후진적이고 촌스런 민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나는 결단코 ‘민족’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살 거야! 민족이라는 이 혐오스러운 ‘때’를 내 피부와 의식으로부터 박박 문질러 벗겨 내고, 그 대신 근사하고 멋들어진 서구의 역사를 숭배하며 살 거야! 난 이제부터 몸도 마음도 서양사람으로 살 거라고! 암, 그렇고말고 ‘짚신’과 ‘상투’와 ‘엽전’의 역사 . . . 퉷-퉷 . . . 아~~~ 생각만 해도 치 떨려!”
3
우리는 우리 역사에 부재한 ‘찬란한’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우러러보면서 밋밋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조선 왕조의 “정체(停滯)”에 한숨을 내쉬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길어도 너무 긴 그 500년 세월 동안 우리 조상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한 것인지, 왜 세계에 내세울 만한 발전과 진보의 업적을 이룩해 내지 못한 것인지 의아해하면서, 조상 경멸과 혐오의 길로 치닫는다. 나라 하나 지킬 힘도 없어서 온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조선의 봉건 사대부 지배계층. . . 퉷-퉷 . . .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그들을 한없이 미워하도록 교육받아왔다.
그래서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김옥균이 되고 서재필이 되고 이승만이 되고 박정희가 되었다. 어떻게든 서구식 부국강병 ‘근대화’를 이루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라는 생각에서였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근대화시키는 것, 그것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신념 구조는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근대화’라는 최고 정점의 가치는 이제 아예 ‘신앙의 영역’으로 이동해버렸다. 그래서 사회의 근대적 합리화는 신흥 종교의 교리처럼 되어버려 ‘재주술화’ 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 옛것은 모두 무가치하고 퇴행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조선 왕조를 비롯한 우리 역사는 그저 ‘악몽’에 불과하고, 잘해봐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실패의 기억’ 정도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서구의 근대적 가치는 절대적으로 존중받고 떠받들어야 할 그 무엇으로 격상되었다.
전 국민이 ‘신청년(新靑年)’이 되어 민족과 조상과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 과학과 민주주의를 칭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월한 군사력과 과학기술로 압축되는 서구를 있게 해 준 이면에는 자본주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게끔 길을 터 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있음을 끊임없이 주입 당해왔다. 다시 말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화로운 누적적 진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피의 투쟁으로 범벅된 고귀한 시민혁명”이라는 폭발적 질적 변화 때문에 새롭게 구축된 서구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착이야말로 근대 이후 지금까지 서구국가들을 세계의 주역으로 만들어준 원동력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 누구도 찍소리 내지 못했다. 그저 주눅 든 마음으로 이를 수긍하고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키며 살아왔다. 초라한 우리 현실과 화려한 서구 현실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엄존하는 물질적 증거로 인해 그러한 주장은 무한한 설득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4
문제는 바로 “시민혁명”이다. 서양만이 가지고 있다는 이 독특한 역사 정치적 경험인 이 시민혁명은 그 “명품” 브랜드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한껏 뽐내고 있다. 물론 그간 몇몇 도전적 수정주의 해석으로 얼마간 ‘기스’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 위세는 대단하다. 반면 그런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머지 비서구 국가들은 자신을 낮추며 “보편적 역사발전의 바른길”를 거치지 못한 열등한 것으로서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겨왔다. 모자라고 덜 떨어진 ‘열등의 역사’임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아왔던 것이다.
5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필자는 근대 서구 “혁명”이라고 명명되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해부해 보게 되었다. 일단은 서구 의회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국 혁명”에 메스를 집어 들고 장시간 집중적 ‘부검(autopsy)’을 시작해 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검이 진행됨에 따라 드러나는 사실은 부르주아 계급이 앞장서고 후미에서는 각성한 대중이 지지하는 고귀한 혁명은 발견할 수 없고, 가다피를 제거한 <리비아식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의 원형 전술>이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당시의 ‘가다피’는 찰스 1세였다. 가다피는 맞아 죽었지만 찰스 1세는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전체 작전의 구성은 놀라우리만치 흡사했다.
6
“영국 혁명”을 다룬 수백 종의 “권위” 있는 주류 역사서들이 있다. 그러나 이 저작들의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혁명”의 총체적 기획자이며 자금공급자였던 네덜란드 기반의 범유럽 유대 네트워크의 존재를 삭제해 버린 것이다. ‘개종자(converso)’ 혹은 ‘마라노(marrano)’라 불리는 이들 유대인은 당시 스페인 제국은 물론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을 상대로 국제적인 무역업에 종사했다. 아울러 대부업의 중심에 서서 왕가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채무-채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 지구적인 정보망과 군사 동원력과 첩보 네트워크를 가진 이들이 당시 조금 휘청거리는 스튜어트 왕조를 무너뜨리기는 물론 쉽지는 않지만 결국은 성공해서 “영국 혁명”이라는 인장을 받은 벤처사업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왕정복고 이후 이들은 급기야 레짐 체인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직접 침공으로 전술을 바꾼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 오렌지 공을 앞세우고 영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해 점령해버리고 얼마 후 하노버 왕조로 교체시킨 후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만든다. 이후 영국은 이상하게도 국가부채가 매년 폭증하고 세금을 모두 이자 갚는데 써버리는 빚(debt)에 쩔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우연의 연속은 아니리라. 치밀한 전략으로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집단이 있음에도 이를 굳이 부인하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순진 박약해서 세상 살벌한 거 모르는 휴머니즘 바보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유대 국제 무역상들과 국제대부업 과두들(oligarch)이 마치 지금의 초국적 기업처럼 유기적으로 결합한 형태인 ‘더치 커넥션(Dutch Connection)’ 세력이 현지 에이전트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과 이를 따르는 강경 칼뱅주의 퓨리턴 무리가 ‘의회’를 중심으로 ‘국왕시해’를 최종 목표를 하는 범유럽 적 차원의 유대 네트워크가 벌인, 대단히 정밀하게 조율된 리비아식 레짐 체인지의 원형 전술이 “영국 혁명”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다. [계속]
*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근간 ‘예정’인 『기획된 혁명: 제1편 영국혁명』을 참조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