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반(反)근대 전통주의, 세계의 걸작을 찾아서: 《완정문고》 제1권(2회) I
– 끌레어 꼴롬비(Claire COLOMBI). 『“암흑” 중세 신화 뒤집기(La légende noire du moyen age)』. KONTRE KULTURE. 2017
우리말 번역: 류소민/불문 번역가
해제: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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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 시절 역사학계 ‘서강학파’ 일원이었던 고(故) 길현모 교수(1923-2007)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다. 그 주제들에 관해 무슨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학과 전공 필수 과목이라 무조건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길교수님이 걸음걸이를 하실 때 정상인처럼 걷지 못하고 뒤뚱뒤뚱 매우 불편하게 걸어 다니셨던 모습이다. 학과 선배들이 말해주길 선생님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는데 앞장 서다가 끌려가 고문을 받은 후유증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수업을 하도 건성건성 들어서 지금 그분 강의 내용 중에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단 한가지만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라는 인명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그의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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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레어 꼴롬비(Claire COLOMBI)가 쓴『“암흑” 중세 신화 뒤집기(La légende noire du moyen age)』는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에서 제1장은 조작된 ‘르네상스 신화’를 벗겨내는데 할애된다. 그녀는 문헌추적을 통해 르네상스 신화가 형성된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그런데 거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와 그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이다. 그녀는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 신화 창조의 ‘수괴’임을 고발하고 있다. 역사학자 꼴롬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저서(『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핵심 요점은 14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근대인’이 탄생한다는 발견이다. 개인주의와 실증과학, 진정한 철학, 그리고 진정한 의미를 갖는 근대국가가 모두 이 때 탄생한다고 말하고 있다.이 때부터 인간은 현실을 상상하는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견하게 되며, “이제껏 인간 영혼을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은 모두 신앙과 편견, 무지와 허상들이었다. (…) 이 베일을 처음으로 벗긴 곳이 이탈리아였고, 처음으로 지상의 만물을 연구하고 ‘국가’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중략)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저서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독일 역사학자 칼 브란디(Karl Brandi)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에 대한 정의는 부르크하르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역사학자 왈라스 퍼거슨(Wallace K. Ferguson)은 “부르크하르트의 사상은 이런 암묵적인 전제에 근거해 있다. 즉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의식(Volksgeist)이 공동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같이 특정한 의식이 변화가 일어난다는 전제를 20년 후 존 아딩턴 사이몬드(John Addington Symonds)도 거듭 반복하게 된다. 그의 저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서문에서 그는 이런 정의를 내리고 있다. “[르네상스는] 자유의 탄생이라 부를 수 있다. 인류의 의식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자립적 결정권을 취득하며, 예술을 통해 외부 세계와 인간 신체가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유로운 이성을 과학 분야에 투사하고 자유에 기반한 정치관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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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로마 제국은 395년에 동서로 분리된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반면에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까지 지속되다가 오스만투르크에게 정복당해 역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서양사 시대 구분상 중세는 통상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지칭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 기나긴 중세 1,000년 동안을 “암흑”이라고 규정하고 중세라는 ‘칙칙한 어둠’을 뚫고 찬란한 이성과 빛이 14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로마교황청과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페라라, 나폴리 등에 산재해 있던 군소 도시국가들과 왕국들이 [생존과] 이권을 둘러싼 잔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에서 밀린 도시국가들이 외세인 프랑스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을 끌어들여 상대를 압박하려 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전역은 내전과 외침이 끊이지 않는 전란의 아수라장”이었다. 주1)
[이미지1]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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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당시 형식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다. 1183년 양측이 콘스탄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해주는 조건 아래 각 도시는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대립하는 기본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자 일부 도시국가에서는 시뇨리아signoria(참주정)라는 비상체제를 도입해 전권을 위임 받은 독재자로 하여금 공동체 대표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시뇨리아는 임기가 종신제로 바뀌고 세습되면서 궁극에는 로마 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작위를 부여 받게 되면서 군주제로 변모되었다.이렇듯 르네상스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극도로 혼전의 시기였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을 통해 확대된 교역으로 경제 규모가 급팽창하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하였고 따라서 세력이 그만큼 확대되었다. 당시 인구가 2만 이상인 도시가 이탈리아 북부에만 23개나 있었다. 특히, 피렌체 인구는 10만에 육박해 유럽 전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발전 일로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도시국가들로는 베니스(= 베네치아), 플로렌스(= 피렌체), 제노바, 밀란, 나폴리 그리고 교황령 등을 꼽을 수 있다. 제각기 도시국가들은 자체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무역에서 제조업에 이르는 광범위한 경제 행위에 종사하고 있었다. 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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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번영’ 속에서 가능했다. 북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람은 부와 권력의 중심지인 베네치아(= 베니스)와 피렌체(= 플로렌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양대 도시국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부를 소유한 예술 후원자들, 예를 들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같은 이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조각가, 시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던 명망 있는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예술만을 사랑해서 그랬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도시국가 경제를 장악한 패권 과두들이 그들의 넘쳐 나는 재부 중에서 일부를 떼내어 예술에 투자한 것이 순수한 자선사업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시국가 내 시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인지도를 상승시키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여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예술을 활용했던 측면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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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받은 예술가들은 답례 겸 로렌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를 미화한 회화나 조각상 같은 예술품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로렌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관대하고 현명한 지도자’라는 훌륭한 이미지를 이탈리아 곳곳에 퍼뜨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로렌초는 피렌체 시민을 대상으로 거대한 규모의 가면무도회와 며칠 동안 계속되는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 뒤편에서는 도시 재정을 비롯한 모든 권한과 결정권을 차지하는 독재 정치를 펴나가고 있었다.
로렌초는 로마의 명문 귀족인 오르시니 가문과 혼사를 맺고, 포조아카이아노에 왕들이 사는 궁전보다 더 크고 화려한 규모의 저택을 지었다. 그의 아들과 딸이 각각 오르시니 가문의 딸과 교황의 아들과 결혼을 할 만큼 메디치 가문의 영화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로렌초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임의대로 도시를 다스리는 시뇨리아, 즉 독재자였다. 도시의 금고는 그의 마음대로 사용되었으며, 그가 휘두르는 권력의 횡포를 아무도 비판하거나 견제하지 못했다. 시민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화려한 행사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도 결국은 권력을 계속 누리기 위해 비판 세력의 눈을 가리는 일종의 위장막이었다.” 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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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앞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세력 역학 메커니즘을 보다 깊이 연구해 르네상스 시기에 생산된 예술 작품들이 구체적으로 그 후원자들의 어떠한 정치사회적 용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추적해 본다면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과장임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제껏 인간의 영혼을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은 모두 신앙과 편견, 무지와 허상들이었다. (…) 이 베일을 처음으로 벗긴 곳이 이탈리아였고, 처음으로 지상의 만물을 연구하고 ‘국가’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라는 과장 말이다.
이러한 연구는 중세의 “종교적 맹신”으로부터 벗어나 르네상스 시기가 도래해 드디어 인본주의와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와 과학정신이 만개했다는 식의 르네상스 묘사가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돈 많은 권세가들이 도시국가의 공화적 과두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적극 고용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작품을 주문 제작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아래 인용은 이를 실증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 작품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술 이외의 목적으로’ 이용되었는지를 돈 대는 후원자와 돈 받는 예술가 사이의 종속관계 ㅡ 혹은 상명하복 관계 ㅡ 를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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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미술 후원자들은 화가들이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돕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화가의 작업에 종종 시시콜콜 간섭하였으며, 화가는 그들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주관을 상당 수준 억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후원자의 예술애호정책 덕분에 자유로운 지적, 정신적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후원자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미술적 재능과 순응적 자세를 동시에 갖춘 화가를 찾았으며 그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르네상스 미술의 후원자는 화가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예술을 진흥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화가를 부리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중략)
르네상스 시대 전제 군주들의 위세는 예술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끌어 모아 그 재능을 맘껏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달려있었다. 특히 미술 분야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군주들은 이 부분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피에로 데 메디치는 베노초 고촐리를 후원해 메디치 궁의 예배당 「동방 박사의 행렬」이란 벽화를 장식했다. 피에로가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고촐리를 선택한 것은 그의 그림 실력도 뛰어났겠지만, 그가 그림을 완성시키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피에로는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인 피렌체 종교회의에 대한 내용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해 자기 가문의 영광을 알리고 과시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촐리 화풍이나 미술적 역량은 피에로에게 큰 관심이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에로는 고촐리가 그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 보다는 빠른 속도로 자신의 자세한 주문이 작품으로 완성되길 바랐던 것이다.
후원자의 후원성향에 대해 알 수 있는 두 번째 작품으로는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가 후원하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가 완성한 「마리아의 일생」, 「세례요한의 일생」을 들 수 있다. 지오반니가 기를란다이오를 선택해 작품을 완성하도록 후원한 이유는, 지오반니의 친척인 프란체스코로부터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기를란다이오를 선택했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세티 예배당의 벽화를 완성하였던 유명한 화가였다는 점이다. 기를란다이오의 유명세를 통해 지오반니는 자신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명한 화가 기를란다이오를 선택하고,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벽화를 릿치가 대신 장식하도록 후원해 그 가문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따라서 지오반니는 자신의 가문이 대외적으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기를란다이오에게 세세하게 주문을 한다. 색 선정과 색을 써야 할 곳 등을 정했으며, 토르나부오니 가문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했다. 이러한 주문사항은 그림에 하나하나 반영되었다.
마지막으로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그린 「사랑과 순결의 싸움」을 후원한 이사벨라 데스테의 후원성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사벨라는 만토바 궁의 스투디올로를 장식하기 위해 궁정화가인 만테냐의 작품을 비롯해 유명 화가의 작품을 후원한다. 이사벨라가 보티첼리를 후원하지 않고, 로렌조 코스타와 피에트로 페루지노를 후원한 것은 그녀와의 개인적인 연관성 때문이었다. 이사벨라는 페루지노에게 후작부인으로서 어울리는 미덕과 교양의 방법으로 미화한 이미지의 작품을 주문하게 된다. 주문할 때는 페루지노의 상상력이 작용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주문을 한다. 페루지노는 이사벨라가 주문한 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의 재주를 과시한 부분에 있어서 이사벨라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이 작품은 페루지노의 작품 중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 작품을 후원한 후원자들이 가진 공통점이라면 화가의 창조적 역량은 배제하고, 인물선정에서부터 인물 위치와 색깔 사용 등을 지정해 까다롭게 간섭했다는 점이다. 비록 페루지노와 이사벨라의 의견충돌이 보이기는 하나,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세세한 거의 모든 계약 내용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화가가 자신의 기량을 자유롭게 발휘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후원자들간 차이점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주문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 주문 시에 피에로와 지오반니는 자신 가문의 인물을 등장시키도록 했다. 따라서 화가는 인물들을 초상화처럼 표현하였으며, 더 나은 모습을 위해 이상화시키기도 했다. 반면 이사벨라는 자신이 직접 그림 속의 초상화처럼 드러나도록 하지 않았다. 작품의 주인공이 후작부인의 모습을 대변해 주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볼 때, 후원자는 자신의 주문 목적에 따라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의 개인적 기량이나 화풍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후원하는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의 화풍보다는 화가의 작업 속도나 화가로서의 이미지가 후원자로 하여금 화가를 선택하여 후원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결국 화가의 화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후원자는 작품 속에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화가의 생각보다는 후원자 자신의 생각을 적극 반영하고자 했다. 이는 화가와 주고받은 편지나 계약서,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 후원자들은 화가가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펼치며 작업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돕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의 간섭 속에서 화가는 자신의 주관을 상당 부분 억제하면서 후원자 요구에 맞춰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후원자의 예술애호정책 덕분에 자유로운 지적, 정신적 활동을 전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미술적 재능과 순응적 자세를 동시에 갖춘 화가를 찾았으며 그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후원자는 화가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예술을 진흥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화가를 부리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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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르네상스 시대 행해졌던 OEM 작품 주문생산 방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무슨 ‘자유 정신’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는 ‘재생(르네상스)’이라고 정의 내리기가 낯 뜨거울 정도로 그런 작품이 희귀하다. 그리고 주제 면에서도 압도적으로 종교적이다. 도대체 뭐가 재생되었다는 것인지 그리고 도대체 뭐가 인간 중심이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르네상스 시기는 우리 역사로 치면 14세기 여말선초(麗末鮮初)에서 임진왜란(1592-1598)까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언급한 기초 지식을 배경으로 꼴롬비 글을 읽는다면 르네상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본다. 르네상스를 다룬 제1장에서 중요 부분을 발췌하여 실었으니 [완정] 독자들은 일단은 ‘맛보기’로 만족하고, 향후 이 책이 출판되면 그 때 전문을 읽으면 될 것이다. 제1장 목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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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번역: 류소민/불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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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목차
I.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조작극: 문헌 추적
– 묻지마 절찬을 받는, ‘창조’되는 르네상스
– “암흑”을 거두고 미술을 ‘창조’하는 이탈리아
– 내친 김에 문학도 ‘재발명’하다
– 신(神)을 의심하는 유럽
– “진보적” 인문주의에 전복되는 “야만적” 고딕
– 이탈리아는 잿더미 속에서 무엇을 복구했는가?
I.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조작극: 문헌 추적
<묻지마 절찬을 받는, ‘창조’되는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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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르네상스는 암울한 중세에 대한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이 두 시기를 대조하는 것이야말로 압도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 남긴다. 끊임없이 칭송을 받는 르네상스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이성적이고 예민하며 더 이상의 형용사가 있다면 무조건 가져다 써도 무리가 안 된다. 이에 반해 바로 전 시대인 중세는 한층 더 침울하고, 미개하고, 거칠며 냉음 (冷陰)한 시기로 보인다.
역사학자 쟈크 헤어는『중세라는 사기』에서 책 1부 제목을 「중세와 르네상스, 창의적 작명의 마법」이라고 짓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우리 시대 평범한 단어가 되어 대화를 할 때 별도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우선은 역사상 특정 시기이며 건축양식의 한 장르이기도 하고 또 미술사 차원에서는 한 시대, 그 외에 철학의 한 부류이기도 하고, 과학분야의 새로운 인식론 등등 각 분야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다.
[이미지2] 중세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활발했던 마녀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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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언급할 때 우리는 미켈란젤로를 뺄 수 없겠고, 프랑수와 1세, 인본주의 철학가들, 스콜라 학파의 소멸, 신플라톤 학파, 르와르 강변의 성들 건축 등 사건을 연상시킨다. 또한 인쇄기술 도입과 대탐험을 시작한 콜럼부스와 바스쿠 다 가마의 시대이기도 했다.사전을 찾아 보면 르네상스에 대한 정의들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종교, 신화 : (인물을 말해) 부활하다. 회생의 유의어
카톨릭 신학 : 정신적 재활. 예수 안에서 인간의 재생
역사 : 사회문화적 운동으로 고대 고전 형식으로의 복귀, 15, 16세기에 사상과 예술방면에서 격변을 불러옴, 이 현상을 포함한 시기의 명칭.
예술, 문학 :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15세기에 출현한 그리스 라틴의 고전양식으로의 복귀는 중세 미학의 종료와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함
역사적 시기로는 즉 15-16세기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시기라 불리우며, 이 시기는 중세와 근대에 걸쳐있는 시기에 해당한다.‘재생’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생명을 되찾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이전에는 유럽이 죽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르네상스라는 명칭 안에 그 개념을 만들어 퍼뜨린 주체들의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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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ㅡ 이탈리아 말로 리네쉬멘또(Rinascimento) ㅡ 라는 용어는 1550년경 플로렌스 지방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총서 『미술 조각 건축의 거장들』에서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난히 이탈리아 중심주의적인 이 책에서는 “유럽 최고 거장들”이라면서 소개된 예술가들이 몽땅 플로렌스와 시에나(Siena) 출신들이었다는 점이 무척 특이하다. 따라서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개발되어 쓰인 정황은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문화예술 풍조를 묘사한 것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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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중세’라는 명칭이 이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지어진 이름이라는 점이다. 즉 1688년 독일 개신교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프 켈러가 ‘중세(medium aevum)’라는 용어를 독일어 문법책에서 ‘처음으로’ 쓰게 된다. ‘중간(medium)’이라는 단어는 원래 언어학에서 언어의 발전 단계를 지칭하는데 쓰이는 용어다. 예를 들어, ‘고대 프랑스어’ 단계에서 ‘중간 프랑스어’ 단계로 발전했다는 식의 구분이다. 라틴어 발전 역사에서도 그런 식으로 구분한다: 고(古)라틴, 고전(古典)라틴, 저(低)라틴, 중(中)라틴, 그리고 중세(中世)라틴. 이런 어학용 구분이 한 언어학자에 의해서 역사 시대구분에 오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중간’이란 형용사가 언어학적 용도 이외에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데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medium aevum)가 중간 시대로 자리 잡게 되고, 고전 시대와 근대 시대를 연결하는 중간 시기로 정의되었다. 마치 천 년의 중세문화가 어느 날 갑자기 ‘근대’라는 왕자님이 불쑥 나타나서 ‘죽은듯한 잠’에 빠져든 중세라는 백설공주를 깨우기 위해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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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라는 명칭은 쉽게 이용되지 않았기에 알려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세기 계몽주의 백과사전에도 올라있지 않았고 이 명칭이 사전에 등재된 것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부터다.
리네쉬멘또(Rinascimento)의 초기 용례는 주로 예술과 문학 분야에 한정되어 쓰이다가, 19세기가 되자 ‘갑자기’ 유럽문명이 16세기에 예술과 정치, 경제, 과학, 그리고 기술 등의 전(全)분야에서 다시 부활했던 것처럼 거론되었다. 1840년 쟝 쟈크 앙페(Jean Jacques Ampère)라는 저자는 다양한 시대를 분류하면서 유럽에 있었던 여러 ‘재활들’을 언급했다. 카로렝지안 재활, 12세기의 재활, 그리고 16세기의 재활이 그것이다. 그 유명한 쥴 미슐레(Jules Michelet)가 『프랑스 역사』를 쓰며 이를 곧장 모방했는데, 미슐레는 바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16세기의 르네상스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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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사텔(Neuchatel)에서 공부한 스위스 개신교 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는 1860년 유명한 저작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로 예술사 서술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이 저서의 핵심 요점은 14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근대인’이 탄생한다는 발견이다. 개인주의와 실증과학, 진정한 철학,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근대국가가 모두 이 때 탄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부터 인간은 현실을 상상하는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견하게 되며, “이제껏 인간의 영혼을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은 모두 신앙과 편견, 무지와 허상들이었다. (…) 이 베일을 처음으로 벗긴 곳이 이탈리아였고, 처음으로 지상의 만물을 연구하고 ‘국가’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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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베일’의 비유가 유난히 인상 깊다. 이 베일은 바로 예루살렘 사원의 베일에 대한 명백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루살렘 사원의 베일은 예수가 죽자 동시에 찢어지는데 바로 기독교 탄생을 예고하는 의미이다. 위에서 본 사전의 정의에서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종교적 의미로 (예수와 관련된) 부활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의미의 회생이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저서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독일 역사학자 칼 브란디(Karl Brandi)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의 정의는 부르크하르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역사학자 왈라스 퍼거슨(Wallace K. Ferguson)은 “부르크하르트의 사상은 이런 암묵적인 전제에 근거해 있다. 즉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의식(Volksgeist)이 공동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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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특정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전제를 20년 후 존 아딩턴 사이몬드(John Addington Symonds)도 거듭 반복하게 된다. 그의 저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서문에서 그는 이런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자유의 탄생이라 부를 수 있다. 인류의 의식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자립적 결정권을 취득하며 예술을 통해 외부 세계와 인간 신체가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유로운 이성을 과학 분야에 투사하고 자유에 기반한 정치관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시인 겸 비평가인 사이몬드는 잘 알려진 동성애 옹호론자였고 『그리스 윤리의 문제점』이라는 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 있던 변태성과 동성애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그 시대 법 처벌의 정당성과 ‘반(反)자연’ 이라고 불리던 동성애 행위의 철학적 근거를 논의하는 내용이다. 이어서 나온 그의 『현대 윤리의 문제점』이라는 책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현대사회의 부정적 견해를 인류학적, 의학적, 법적 관점에서 토론한다. 사이몬드 관심은 무엇보다도 16세기 예술에 등장하는 남성 누드에 주목되어 있었다. 그는 미켈란젤로 그림을 “절대불멸의 미”라고 규정한다. 결국 한 동성애자 문필가에 의해 이후 수세대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미학적 기준이 설립된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1911년에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의 「르네상스 편」을 편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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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저자들의 공통적 의견은 모두가 ‘예술적 혁신’ 차원을 다분히 추월하는 그 무언가가 이탈리아에서 15세기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자유’라는 전례 없던 바람이 이 때 유럽에 불기 시작했고 인류 전체를 사회, 과학, 기술, 정치, 윤리 분야에서 발전 단계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실증적 차원에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발전’ 이라는 이름의 인류학적 계보를 만드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탈리아 15-16세기에 대한 자신들 환상과 그것의 선동에만 전념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미슐레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오리무중의 은유에 혼자 도취되기도 한다. “괴상망측하고 인위적인 중세 상태는 지속되어도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고 본다. 중세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막으며 저항한 오랜 기간일 뿐이다. (…) 사망한 지 이미 오래 되었기에 죽기도 더 힘든 중세는 버티다가 결국 살지도 못해보고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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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정적 열기가 넘치는 환상 속에서 19세기가 지나가고 20세기 들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리정돈을 시도하게 된다.
“휴머니즘, 합리주의, 개신교 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얼토당토 않은 누명을 씌운 중세를 변호하는 것은 당연했고 어차피 너무나 터무니 없고 편파적 주장들을 펼쳤기에 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ㅡ 퍼거슨 (Ferguson)의 『르네상스』에서 발췌.
르네상스는 휴머니즘이란 새로운 철학을 낳았고 미술, 건축, 시 분야에서 새로운 미학을 탄생시켰다는 담론은 검증을 필요로 한다. 또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까지 3백년의 기간에 걸쳐 펼쳐졌다는 주장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미술과 건축 분야를 다루는 거의 모든 예술사 책들은 다음 방식으로 시기를 분류한다. 르네상스 초기는 1420-1500년(동시에 중세의 종결점), 1530년까지는 전성기, 1530년-1580년을 말기로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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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전유럽에 적용되었을 뿐 예외인 이탈리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르네상스를 잉태했고 창시했던 이탈리아는 그 이웃나라들에 비해 너무나 일찍 앞서 간 상태라서 일단의 예술가들은 추가적으로 설정된 전기 르네상스라는 시기, 1300년(트레센토), 아니 1200년말(두젠토)까지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같은 이론을 학술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지는 진정 의문이다!
<암흑을 거두고 미술을 창조하는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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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즉 13세기 말(두젠토)부터 14세기(트레센토)에 걸쳐서 이웃나라들보다 훨씬 일찍 출발한다고 한다. 그 시기에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는 중세문화의 전성기가 한창이었건만 이탈리아에서만 유독 앞선 현대적 문화, 종교, 미학들이 잉태되고 있었다는 관점이다. 이렇게 너무 일찍 조산된 예술가들 중 한 명이 유명한 플로렌스의 화가 겸 건축가인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다. 천재적 화가인 지오토는 1266년에 탄생한다. 즉 프랑스 생 루이 왕정의 40년차에 해당되는 시기다. 상대적 지표를 추가하자면 이 시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고, 지오토가 20세 되는 해에는 필립 4세 미남왕이 권좌에 오르게 된다. 지오토가 41세가 되는 해에는 필립 4세가 템플기사단을 해산시키던 해이다. 이 시기야말로 중세의 정점에 해당한다.
지오토는 후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라파엘과 미켈란젤로가 그에게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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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얘기했던 이탈리아 중심으로 예술가들을 선정하며 르네상스라는 명칭을 유행시켰던 바자리는 지오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그림이 무언지도 모르던 그 무식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지오토를 통해 데셍이 되살아 날 수 있었다는 게… “
즉 13세기에는 사람들이 데셍이 뭔지도 몰랐다는 얘기다. 허걱…
바자리의 묘사 이후로 지오토는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선구자로 간주되었다. 예술사에서 그는 시마부에(1240-1302), 시에나의 두치오(1265-1318),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4), 마테오 지오바네티(1322-1368), 로렌제티 형제(1280-1348; 1290-348) 등과 더불어 ‘전초 이탈리아’ 화가들로 분류되어 있다. (전초 이탈리아라는 표현이 ‘전기 르네상스’ 보다는 훨씬 미학적으로 나아 보인다)
그들을 ‘전초’라 명명하는 것도 이들에게 15-16세기에 등장할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특별한 통찰력과 신통술이 있었다는 전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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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헤어(Jacques Heers) 가 지적하듯이 이 모든 게 다 속임수에 속하는 것이다. “대부분 프랑스 대학에서는 (…) 15세기 프랑스 예술사는 중세예술사 과목으로 분류해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 이탈리아 예술사는 때로는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대미술사 교수들이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다. 정확히 동시대 이탈리아와 프랑스 예술을 하나의 강의나 하나의 책에서 같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한심하고 웃기는 일이다. 독자나 학생들에게 비교 연구를 못하게끔 막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여전히 예술사 강의들은 이런 요상한 방식으로 분류되어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속임수로 인해 ‘전초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만약 당시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을 방문했다면 현장에서 볼 수 있었을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물들을 놓칠 수 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 때가 중세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와 시에나 지방의 예술을 ‘전초 이탈리아’, 즉 15-17세기의 미술을 예고하는 ‘전기 르네상스’로 명명하는 것은 그 속에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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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어떤 문화예술적 풍조를 ‘전기 00’로 지칭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예술 풍조들을 거론하면서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얘기할 수는 있어도 어느 것이 그 다음에 올 것을 미리 앞서서 존재했다는 발상은 무리다. 이런 방식의 사고를 역사학과 철학에서는 ‘목적론’이라고 부른다. 역사학자들은 어떤 현상의 결과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추후를 예측할 수는 없다. 어떤 흐름이 다음에 오는 단계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그 후에 있을 일을 미리 예측하고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예언자적 혹은 메시아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는 다음 단계에 나타날 사건이나 인물을 얼마든지 예측하고 기대하며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초 예술가들’이 그런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부류라는 증거는 없는 듯 하다. 과연 지오토가 이런 예지적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일세기 반 후에 나타날 운동의 선구자가 될 것이다! 나는 회화 분야에서 라파엘의 표본이 될 것이고 건축 분야에서는 도나텔로의 모범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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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적으로 우리의 ‘전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카톨릭 종교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장면들, 성자들의 삶, 순교자들의 고행, 이런 것들이 그들의 주된 영감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형벌, 성모와 아기 예수, 성모영보(聖母領報), 성 장 바티스트의 삶, 이런 주제들을 담은 제단화와 벽화들이 ‘고대로의 회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가히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13세기에 있었던 유럽의 종교적 부흥과 직결되는 지오토의 저명한 대표작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지3] 지오토(Giotto)의 「십자가형(The Crucifixion)」
원제: La Crocifissione / Date: c.1320 – c.1325
Style: 전초 르네상스(Proto Renaissance)
이 시기는 마침 새로운 카톨릭 수도회들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유명한 ‘작은 형제단’과 ‘설교 형제단’의 창설이 그 예이고 오늘날에 와서는 ‘성프란체스코회’와 ‘성도미니크회’라고 불리운다.
성프란체스코가 서거한 2년 뒤인 1228년에 교황은 ‘가난뱅이’의 시성식을 올리기 위해 아시스를 방문한다. 성자를 안장할 묘를 마련하고 순례자들 방문을 받기 위해서는 출생지에 성당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수비아코 언덕에 있던 로만 양식의 작은 성당에 묘를 꾸미고 옆에 새로운 고딕 형식의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253년에 완성된다. 두 건물의 조합으로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의 대성당이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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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회의 첫 교황인 니콜라이 4세는 1288년 지오토에게 신축 성당의 벽화를 주문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원조’ 라고 불리우는 지오토는 오로지 종교적인 주제로만 성당 모든 벽을 장식한다. 새로 태어난 성자와 그가 설립한 수도회를 기념으로 그린 벽화들이 탄생한 것이 1288년과 1300년 사이였다.
1508년과 1512년 사이에 그려진 그 유명한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있는 미켈란젤로 그림에서 고대 그리스 영향이 명백히 나타난다면, 지오토와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비율, 배경, 의상 등에서 고대 그리스와 연결되는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자아, 그러면 왜 지오토 같은 그 시기 화가들을 ‘전초 00’라 부르며 굳이 ‘르네상스’라 불리우는 시대와 연결을 지으려는 것일까?
여러 사전에서는 르네상스를 ‘고대 그리스의 주제와 시각의 복귀’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그리스 로마시대 남여신들에 대한 묘사, 흰 대리석과 신전의 기둥 회랑(주랑, 柱廊), 그리스식 복장, 투시도법 사용 등이 주 내용이다.
그런데 13-4세기에 이런 것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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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쉬멘또(Rinascimento)’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했던 바자리는 현실의 관찰에 근거한 이론을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과 상반될지라도 자신이 펼치고 싶었던 주장을 펼쳤을 뿐이다. 즉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가상의 이념일 뿐이다.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지어낸 이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논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주장은 13세기에 말에 이탈리아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특정한 움직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움직임은 차츰 중세의 암흑과 야만을 뚫고 눈부신 빛을 향해 갔고 그 과정에서 그 동안 잊혀졌던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양식으로 복귀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1240년에는 신의 섭리로 고명(高名)한 시마부에 가문에서 지오반니가 탄생하게 되고 신의 은총으로 회화 예술이 처음으로 빛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의 상상의 누각에 의하면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이탈리아는 ‘재앙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고 빈사상태의 예술은 ‘재생’, 즉 ‘르네상스’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몰락(476)에서 13세기 사이에는 미와 예술, 모든 문화가 전멸했었고 오직 야만이 지배했었다는 주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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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의 『예술 총서』는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전체 서문이고 제2권은 두젠토 말기와 트레센토(1300) 시기의 건축, 회화. 조각 분야의 예술가 31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바자리에 의하면 회화 분야에선 지오바니 시마부에(1240-1310), 건축에선 아놀포 디 캄비오(1245-1310), 조각으론 니콜라스 피자노(1225-1278) 등이 빛을 발하는 시초라고 한다. 그 중 누구보다 강렬한 빛을 발하는 인물이 앞에서 보았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1267-1337)라고 한다. 지오토는 시마부에의 제자이고 시마부에는 바자리에 의하면 불빛의 시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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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곤란한 시대적 모순이 발생한다. 조각가 피자노는 1225년 출생이다. 중세 종교학의 거성인 성 아퀴나스와 같은 해 출생이다. 성왕 생 루이를 십자군전쟁에 동반해 기록을 남긴 쟝 드 주엥빌도 같은 해 출생이다. 시마부에가 탄생한 시기는 프랑스 랑그독 지방에서 십자군전투, 즉 카타르 이단교와 카톨릭 남작들의 전투가 한창일 때였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 중세문화가 활발히 펼쳐지는 이 시기에는 이교도들과의 십자군전쟁이 벌어지고, 도미니쿠스회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전 유럽을 누비고 다녔으며, 스콜라 신학자들이 신앙에 대한 주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시기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르네상스가 가져올 현대 예술을 준비하는 것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시대를 앞지르는 진보들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바자리가 말하는,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이란 것이 혹시 ‘발전’이라는 이름의 비스듬한 조명을 타고 비친 것 같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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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물론 희망 차고 더 나은 미래를 예고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이 ‘완벽한 허상’이라는 게 사실이다. 그가 얘기하는 31명 예술가 중에 12명만 1348년에 살아 있었고 그 중 3명은 이 해에 사망하게 된다. 저자는 이 사실들을 함구하고 있다. 고대 이후로 유럽에 닥친 가장 큰 재앙이었고 특히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며 대대적으로 충격을 남긴 중대한 사건을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던 로마제국과 르네상스 사이에 이탈리아를 덮쳤던 ‘재앙의 물결’에 흑사병은 포함되지 않는 듯 하다. 왜냐하면 그의 사건 전개를 따라가자면 재앙들은 1250년 이전에 발생했어야 한다. 바자리에게 1348년은 딱히 특별한 사건이 없던 듯이 지나간다. 그가 말하고 싶은, 둘도 없이 고귀하고 낭만적인 발전의 궤도에서 1348년 여름에 무섭게 닥친 흑사병의 재앙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흑해에 있는 카파 지점에서 귀환하는 제네바 상인들을 따라 들어온 흑사병은 지중해 전지역을 휩쓸게 된다. 유럽에선 590년 이후로 사라졌던 전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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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수집이 어려웠던 만큼 신중하게 만들어진 통계에 의하면 이 때 흑사병은 전염성이 극심한 공기성 전염으로 5년 동안 당시 유럽인구의 30%에서 50%에 해당하는 2천 5백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로 비잔틴 제국과 북아프리카, 중동에서도 큰 피해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인과 치료방식, 전염경로를 모른 채 재앙을 겪은 유럽의 생존자들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게다가 20년이나 30년이 지난 후에 예고도 없이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서 재앙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한 세대를 건너 뛰어 발병하면서 그 사이에 잊고 성장했던 젊은 세대가 다시 재앙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이었다. 특히 항구가 있던 마르세이유나 베니스, 런던 같은 도시에서는 희생이 막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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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 나오는 식인귀처럼 또는 피리를 불며 쥐떼를 몰고 다니던 악마처럼 1348년 이후 주기적으로 출몰하며 아이들과 청년들을 휩쓸어 가는 흑사병은 유럽을 절망에 빠뜨렸다. 에르시니아균 흑사병은 열과 구토, 임파선 부종, 그리고 내출혈로 피부가 얼룩지고 고름 주머니가 차오르게 되면서 며칠을 고통 속에서 시달리다 사망하게 된다. 호흡기 흑사병은 폐 속의 내출혈로 자신의 피로 질식사하게 된다.
교회의 종소리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고 입구가 판자로 막힌 집들, 텅 빈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환자들 신음소리와 시체를 싣고 가는 수레들 바퀴소리였다. 매장 할 장소조차 부족해 피로 얼룩지고 고름이 찬 시체들이 방치 되었고 시신들이 부패하는 냄새가 공기를 진동했다. 이 같은 장면들은 오랫동안 유럽인들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고 종교, 철학, 문화 등의 전 분야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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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로 1280년에서 1550년 사이의 이탈리아 예술만을 거론한다는 것은 절제하는 태도라기보다 자신의 관심만을 합리화하는 후안무치한 태도로 볼 수 밖에 없다.
특히 그가 살던 플로렌스에서는 한 해 여름 사이에 사망자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렀고(인구 9만에서 생존자가 4만 5천으로 통계됨) 시에나에서는 4만 2천의 인구가 1만 5천으로 감소했다. 시에나는 이 충격으로 결국 경제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고 한 때 경쟁 도시였던 플로렌스와 베니스에게 영구히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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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에는 시에나 대성당의 추가건축 계획이 있었다. 지붕 위에 두오모를 추가하고 성당 정면의 남동측을 크게 확대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축가가 흑사병으로 쓰러지면서 계획은 멈췄고 결국에는 어려워진 재정문제로 영구히 건설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라 파카치오네(La facassione)라 불리우는 중단되어 있는 유명한 건물 정면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이제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자리에서 당시에 준비하던 기둥들이 영구히 남긴 흔적들도 볼 수 있다. 이런 미완성된 유적들을 보며 알 수 있는 것은 이탈리아 예술사를 거론하면서 흑사병의 재난을 무시한다면 심각한 이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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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의 논리를 따르면 1240년 시마부에 탄생으로 암흑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1348년 발생하는 흑사병으로 인해 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일어나 힘차게 밀고 나왔다는 ‘발전의 신화’는 성립하지 못하게 된다.
플로렌스와 시에나의 미술사에서 흑사병이 남긴 흔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영국 예술사학자 밀라르드 메이스(Millard Meiss)는 1951년에 출간된 『흑사병 이후의 플로렌스와 시에나 미술』에서 흑사병의 충격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트레첸토(14세기) 초기와 후기 사이의 결정적 단절현상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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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와 1300-1340년 초기 화가들은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인물들 표정을 무척 현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런 묘사는 당시의 엄격하게 상징적이고 형식적이었던 전통과 결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지오토의 화법을 계승했던 제자 베르나르도 다디와 로렌제티 형제, 그리고 마조 디 방코는 모두 흑사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그 외에도 시에나 화법이나 로마, 플로렌스 화법을 이용하던 보조화가들, 또 무명의 화가들이 수 없이 흑사병으로 사라지면서 이런 자연주의 화법, 즉 지오토 화법의 계승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한 화법을 전승한 이들의 대다수가 사라지게 되면 계승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의 미술 에꼴(학파)은 실체적 장소로 화가들이 모여 자기들의 화법뿐 아니라 긴밀한 기술, 또 색감의 비법, 최상의 조화비율, 도구의 사용법 등을 나누던 장소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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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기 벽화들 특징은 인물들의 온유한 표정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성모의 부드러운 미소와 종려나무 잎을 손에 든 성자들의 장엄한 복장과 평온한 표정이 대표적이다. 예수의 고난을 주제로 한 그림도 때로 있었지만 대부분 그림들은 그가 부활한 후 세상을 군림하는 장면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예수가 세상을 군림하는 모습을 pandokrator라고 부르는데 이는 비잔틴 미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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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대대적 출현으로 이 같은 지오토 양식은 소멸되었고 화가들은 다른 양식으로 전향하게 된다. 흑사병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12세기 과거 전통이었던 상징적 형식주의로 다시 귀환한다. 혼란과 대환란을 거치면서 화가들은 시마부에, 지오토, 두치오 등이 대표하던 선진적 ‘현대’ 화법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표준을 다시 찾아야 했고 우선 긴급히 안정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늘 그렇듯이 수백년간 공인을 받고 잘 알려진 방식으로 귀환한 것이다. 흑사병 전후로 나타나는 화법들의 차이는 ‘단절현상’이라 부를 만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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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징적 화법으로의 귀환은 실종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간절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그 한 예로, 지오반니 델 비온도(Giovanni del Biondo)의 흑사병 후에 그린 성요한을 보면 성요한은 발 밑에 오만과 탐욕, 그리고 허영을 누르며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미지4] 지오반니 델 비온도(Giovanni del Biondo) (14th cent.). 「세례 요한과 장면들 Saint John the Baptist and S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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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참고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흑사병 바로 이전에 플로렌스에서는 사기성 위장 도산 사태들이 수없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상업자본 회사들과 국제은행들은 미묘한 자금조작으로 화폐교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작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실물경제에 바탕을 두지 않고 단순한 회계조작으로 파산들이 모래성 무너지듯 도미노처럼 벌어졌다. 불황이 극심했고 수많은 장인들은 전재산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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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346년에는 수확이 좋지 않았고 1347년에는 우박으로 북부 이탈리아에서 타작에 큰 피해가 일어났었다. 보통 식량부족이 있을 때면 북부 도시들은 이탈리아의 곡식창고인 남부 나폴리 지방의 밀을 사들이는 것이 관습이었다. 하지만 북부도시들이 일으킨 재정파탄으로 큰 손해을 입었던 나폴리 지역은 금융조작의 주범들인 북부도시들의 청원을 외면했고 그들의 평가절하된 화폐를 거절하며 식량조달을 거부했다. 이로써 파산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던 북부도시들에 식량이 보급되지 않았고 시골을 제외한 도시에서는 급기야 식량부족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부족한 영양 공급으로 쇠약해진 도시인들에게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재앙들은 신이 보내는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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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발발 후 수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회개와 속죄를 자진해 했고 전반적으로 신앙심이 고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신들의 오만과 탐욕으로 도시에 천벌이 내렸다고 믿었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대체로 죽음에 대한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사회도 삶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델 비온도의 그림에서 성요한이 오만과 탐욕, 그리고 허영을 발 아래 누르며 제압하고 있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가지 죄가 흑사병을 부른 주범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벌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은 신앙을 돈독히 하고 성실한 회개를 하며 신 앞에 겸허한 자세로 머리 숙이는 것 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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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미술과 조각에는 윤리적이고 종말론적 죽음의 그림자를 곁들인 장면들이 나타나게 된다. 지오반니 델 비온도의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와 성자들」에서는 이탈리아 최초로 부패하는 시신이 그림 아래쪽에 등장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이 그림이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 아니라 성모와 아기예수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사랑스러운 주제인 모성애와 순수한 아기예수의 초상화에 부패하는 시신이 동반되었다는 것은 기독교 예술사에서 최초일 뿐만 아니라 대혼돈의 시기를 살던 당시 사람들과 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미지5] 지오반니 델 비온도의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와 성자들」
☛ 그림 최하단부에 부패하여 뼈만 남은 시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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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하는 벽화들도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 유행하게 된다. 오르카냐(Andrea Orcagna)라는 익명의 화가는 지옥에서 악마들이 뾰족한 발톱으로 죄인들 살을 갈기갈기 찢는 잔혹한 장면들을 묘사하기도 했다. 영광의 예수가 통치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이제는 그가 다시 돌아와서 죽은 자와 산 자를 최후로 심판할 일만 남은 듯 하다. 성자들의 고난들도 더욱 잔혹해졌고 더 많은 피가 흘렀다. 이 때부터 성 세바스티안의 활 맞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성 카트리나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쟁반에 들고 등장하게 된다. 고대 기독교 예술부터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중세 로마네스크 우화집들을 거치면서 기독교 예술에서 이렇게 음산하고 비관적 묘사들은 처음이다. 변태적으로 잔인하고 가혹한 죽음의 만행들이 묘사된 적이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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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목할 점은 흑사병이 중세시기에 ‘속하는’ 병이 아니라 중세의 끝자락에 나타났으며 진정한 근대로 가는 기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흑사병은 사회적으로, 또 인구학적으로, 그리고 죽음에 연관된 모든 문화적 측면에 결정적 변화들을 야기하게 된다.잔혹한 고통과 죽음은 집단적 상상 속에서 중세와 연결되는 이미지들이다. 종교재판은 이단인 마녀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고 처형했다. 기근과 추위,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이런 모든 비극적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중세와 연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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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통과 잔혹함이 미화되고 이상화되며 그림들에 등장하는 시점은 중세 끝에서 근대시대로 연결되는 시점이다. 소박하게 성자의 고난을 가려주던 종려나무 가지 대신 잔혹한 상처들과 고문 흔적들이 관객들 시선 앞에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부드러운 표정들, 영롱한 색상들, 평온한 장면들이야 말로 중세 그림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패하는 시신들, 음산한 가무(歌舞)의 묘사, 변태적으로 잔인한 장면들, 이런 것들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세의 말기에 미학으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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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바자리의 관점은 실제 미술 역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조를 뒷받침하기 위한 편의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면 그가 내세웠던 분리와 계승에 대한 이론을 번복할 수 밖에 없다.
유럽예술사는 때때로 기법의 혁신과 특출한 예술가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던 역사다. 바자리의 주장처럼 1260년에서 1280년 사이에 그 어떤 결정적 단절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흑사병을 기점으로 그 이전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으로 명확히 구분될 수는 있는 듯 하다. ‘검은 죽음’의 손이 닿은 후로 다방면에서 그 후유증이 드러났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죽음과 고통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새겨지며 비관적 시각들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또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발생하자 인간 삶의 비참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예수는 죽음을 극복하는 상징이었고 성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면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흑사병 이후의 예수는 수 많은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신음할 뿐이었고 성자들은 단순히 수 없는 고행을 거치는 인물들이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업적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들의 열정적 순교만이 중요해 보였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에서 ‘그가 돌아왔소!’ 하면 ‘그가 정말 돌아왔소?’하고 맞장구 치던 환희의 인사말은 이제 유럽사회에서 사라지는 시대가 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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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흑사병이 남긴 상처와 전염병이 언제라도 창궐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흑사병’ 에서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명랑한 군중들이 모르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책에 의하면 흑사균은 박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균은 수십년 동안 집안의 가구나 이불 속, 방이나 지하실, 가방 속, 서류함 그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에게 큰 교훈이 필요할 때 다시 쥐떼들을 감염시켜 평온한 도시 안으로 죽음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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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나 부르크하르트, 또 19세기 사이먼 등이 주장하는, 중세 말에 빛을 타고 나타나서 이전의 어둠을 퇴치하는 예술사의 구상은 완벽한 몽상으로 보인다. 중세 말기에 또 다른 역경이 있었다면 그 이유는 근대사회의 도림에 있었다. 해양수송이 불러온 흑사병과 적립금의 투기, 국제기업들이 생기며 일어난 환율조작 등이 실물 경제를 흔들었고 또 한편으론 가속된 도시화와 봉건체제의 몰락으로 근대국가의 탄생이 부른 백년전쟁(1337-1453)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의 단일지배에 종말을 고한 종교 대분립(1378-1417)과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이 있었다. 식물인간으로 천년 가까이 숨만 쉬며 연명하던 중세에서 갑자기 근대사회가 탄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전의 구조를 뒤엎으며 자리를 잡은 것이 근대사회의 탄생인 것이다. 근대사회는 혼돈과 무질서의 요소들을 사회 내부에 침투시키고 강화시켰으며 결국 자신이 심은 아수라(阿修羅)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학살적 존재’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방화범이 소방관 역할을 자진하듯이 근대는 ‘통제된 카오스’라는 새로운 질서를 주장했고 급기야 변동과 불안정성을 철학으로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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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예찬론자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예술사를 각각 분리 취급하면서 현실파악을 어렵게 만들었다. 비교할 수 있는 맥락을 흐리게 하고 역사적 의미분석과 자명한 이론설립을 방해한 것이다. 이렇게 기교와 허구, 은폐와 비약을 써서 ‘르네상스 프로파간다’가 작동한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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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또 뜬금없이 19세기에 와서는 르네상스를 절찬하기 시작했을까?
사실 당시의 선구적 발명들은 이탈리아의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나온 첨단적 기법인 유화는 처음으로 작품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액자로 테를 둘러서 벽에 붙였다 떼내어 다시 옮기는 회화 작품의 탄생이 이 때쯤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기법은 이탈리아(롬바르디아)가 아니라 플랑드르(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가 15세기 초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가 잿더미 속에서 다시 복구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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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탈리아 공화국들이 정말로 첨단의 길을 걸었던 분야가 있다. 이 전문 분야에는 14세기 이탈리아가 진정으로 독보적이었고 차후 전세계가 모방하며 추종하게 된다.
불사조처럼 수세기 동안 잿더미 안에서 불꽃을 기다리고 있던 이 분야는 이탈리아에서 부활하면서 유럽 전역을 흔들어 놓는다.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유령과 같은 관습이 다시 숨을 쉰 것이다. 그건 문학도 철학도 미술이나 조각도 아니었던 바로 ‘사업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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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부활의 의미는 바로 고리대금업의 재활에 있었고 이렇게 먼 길을 돌아 다시 나타난 손님은 이름을 ‘자본주의’라며 인사를 했다. 아마도 이성주의자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초기 개신교도들 그리고 19세기 역사가들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손님이었던 듯 하다.
보험금, 어음, 사기업(최초의 국제기업), 관공은행, 운송차별금 . . . 이런 것들이 문학이나 미술보다 훨씬 깊숙이 유럽 사회를 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 이중장부를 발명한 것도 차후 서구에서 르네상스를 극찬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부가 토지에서 생산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이 모든 상업 수법들을 모르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한편으로 고대정신의 복구를 거론하면서 노예제도를 정당화시켰고 로마역사를 추대하면서 정복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 또 도시문화는 지방문화에 비해 우월한 존재가 된다. 라틴어로 도시를 우르브스(Urbs)라 불렀고 영어로는 시티(City)라 불렀다. 이렇듯 새롭고 진보적 사고들이 기반이 되어 ‘신세계’에 원정을 가고 그곳에서 무차별 초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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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사상 그리고 정치분야에서까지 ‘발전’을 숭배하는 작가나 사상가들은 중세를 ‘이전 세계’로 정의해 버린다. 이들에게는 전승이나 전습을 통해 새로운 창의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는 듯 하다. ‘발전’에 도달하려면 이전의 모든 것을 폐기하고 밀어내고 파괴하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 즉 ‘백지 상태’를 의미함)를 거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프랑스혁명, 공화국 설립, 볼세비키 혁명, 더 가까이는 68년 혁명 같은 것이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이었다. 오직 폭력의 강도(intensity)만이 위의 혁명들을 구분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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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이념에 의거하다 보면 사건들의 체계적 분류는 반(反)역사적이 된다. 이들은 한 현상을 기점(출발점)으로 규정하고 다른 모든 현상들을 부수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앞에서 보았던 전초 르네상스가 그런 예가 되겠고 전기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또 다른 예이며 더해서 얼마 전부터는 후기 근대사회(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산업형 서비스업사회 등등이 있다. 이런 형식의 분류는 노브랑그(novlangue, 여론 조작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며 영어로는 newspeak이다)에 속하는 사기성 개념들로서 무의미하거나 오류 투성이고 아니면 내용이 없는 공백성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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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예를 들어, 한 시기나 한 사건을 훌륭하거나 중요하다고 규정하는데 그것이 프랑스혁명이든지 르네상스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 시기에 있었던 모든 예술감각이나 모든 상황들이 자동적으로 무가치하고 추악하다고 규정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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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탈리아의 13세기 트레첸토의 그림들의 놀라운 미적 가치는 19세기에도 다시 인정을 받았고 이들은 시대적으로 따지면 명백한 중세 회화다. 따라서 위의 분류법은 단숨에 무너지는 셈이다. 레진 페르노는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 특히 반 고흐나 고갱이 예술가로서 얼마나 구차한 삶을 살았던가를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그들의 작품에 오늘날 탄복해 마지 않고 있다면 반대로 당시에는 그러한 찬사가 지나친 과장이라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러나 갑자기 프랑스 부유층이 태도를 바꾸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너무 좋은 사업을 놓치고 있었다는 각성이 있었고 예술이 아주 훌륭한 투자처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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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트레첸토와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19세기에 부유층들이 트레첸토의 작품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부득이 이 그림들을 중세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한다. 제단에 올라가던 트레첸토 3폭 장식화들의 원본들 또 당시에 유행되었던 고가의 모조품들을 팔고 전시회를 개최하려면 르네상스와 연결 지어 이 작품들이 바로 르네상스를 예고하는 작품들이라고 소개되어야 했던 것이다. 지오토를 중세의 전형적 화가로 알리는 것은 작품가치를 크게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오토 작품들에서 보는 인물들은 온화한 표정에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화사한 색채로 그려져 있었기에 이들을 도저히 “암흑의 중세시대”와는 연결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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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식한 척 하는 부류들의 상상과는 달리 중세 시기는 경직된 부동의 시대가 아니었다. 수 차례의 르네상스와 부흥기가 길고 긴 중세를 거쳐 지나갔던 것이다. 중세 시기는 끝없이 요동쳤고 여러 면에서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 어떤 시대도 일방적 상승곡선을 그리며 올라갈 수 없는 법이고 반대로 평평한 일직선을 그리며 평행을 달릴 수도 없는 법이다. 역사는 늘 수없이 많은 요인들로 인해 갈짓자로 전개되는 법이다. 어쩌면 14, 15세기의 르네상스는 카톨릭 유럽 국가들이 거쳐온 이전의 여러 르네상스’들’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것이라 생각 된다. 샤를마뉴(Charlemagne, 740-814) 대제 시기에 있었던 학교와 성당의 설립에 따라 펼쳐졌던 지식의 전승과 알쿠인의 지도로 이루어졌던 카롤링거 왕조의 예술적 계승은 또 하나의 진정한 문학과 예술 분야의 르네상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불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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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레고리오 개혁이 1,000년경에 있었고 또 시토회 수도회(Ordo Cisterciensis, 1098년 설립) 의 기여로 새로운 건축기술이 등장했다. 14세기의 혁명이라 불릴 수 있는 ‘대학교’에서 성자 베르나르는 아벨라르와 격한 공론을 벌였고 과학분야에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막대한 공헌이 있었고 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이 모든 학자들이 모여 ‘신(新)스콜라’ 학파를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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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르네상스와 그 이전의 르네상스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르네상스는 처음으로 카톨릭 교단의 후견을 거절했다는 점이고 이로써 유럽 카톨릭의 정신문화적 결집성을 해체했다는 의미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ㅡ [완정]
__________________
ㅡ 후주
주1) 도현신. 『르네상스의 어둠: 빛의 세계에 가려진 11가지 진실』. 생각비행. 2016 (p. 17)
주2)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lee96&logNo=60154495492&proxyReferer=https://www.google.com/
주3) 위의 책 (pp. 28-29)
주4) 송지영. 2008. 「르네상스 미술의 후원자와 화가들」. 석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인천.
ㅡ 이미지 출처
[최상단 이미지]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a. 1486
Uffizi Gallery, Florence
https://www.artsy.net/article/artsy-editorial-italian-renaissance-wealthy-patrons-art-power
[이미지1]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https://therenaissancenhrs.weebly.com/city-states.html
[이미지2]
중세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활발했던 마녀 사냥
[이미지3]
지오토(Giotto)의 「십자가형(The Crucifixion)」
원제: La Crocifissione / Date: c.1320 – c.1325
Style: 전초 르네상스(Proto Renaissance)
https://www.wikiart.org/en/giotto/the-crucifixion-1325-1
[이미지4]
지오반니 델 비온도(Giovanni del Biondo) (14th cent.).
「세례 요한과 장면들 Saint John the Baptist and Scenes」
https://bertchristensen.com/subfour/g124/biondo.htm
[이미지5] 지오반니 델 비온도의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와 성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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