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완정 시론

러시아의 은행 국유화와 실로비키(силовики́) 자본주의

1

선출직 공무원들의 얼굴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때 되면 어김 없이 얼굴이 바뀌지만 바뀐 얼굴들이 국내외 소수 주주가 다 털어 먹게 하는 국가 관리를 연속한다면 이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기도 힘들 것이다.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척도는 ‘얼굴의 바뀜’에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 행사의 주체가 민이냐 군이냐에 따라서 분기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공익’ 혹은 ‘공동선’이 확장되는 ‘지향성’에 있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적 지향성’에 있는 것이다.

 

[민주 대 독재]라는 이항대립의 자유주의 공식은 특정 국가의  ‘민주주의적 지향성’을  측정하는 기준으로는 아주 부적합하다. 부적합을 넘어 아예 그 공식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바람직할 정도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형식’이 아니라 ‘지향적 운동성’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얼굴이 바뀌지 않더라도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군주제는 얼마든지 민주적일 수 있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국가 안의 국가(state within a state)’인 딥 스테이트(deep state)의 역사와 중첩된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개념은 아귀가 들어 맞지 않는 ‘가공의 대립’이기도 하다.  개념적으로만 보면, 민주주의(democracy)는 ‘데모스(demos)의 독재’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가 아닌 것이다. 서양 역사에서 민(民; people)을 나타내는 개념의 변천을 보면  “아테네의 ‘demos’로부터 고대 로마의 ‘populus'(‘plebs’)와 중세의 ‘populus’를 거쳐 르네상스 피렌체(마키아벨리)의 ‘popolo'(‘plebe’)에서 17세기 영국(홉스)과 네덜란드(스피노자)의 ‘multitudo'”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통 1인 1표 투표권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한다. 87년 6월 “호헌철폐 독제 타도!”의 함성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지도 어언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는 지금 당시 아스팔트 위에서 마음 속에 상상했던 ‘민주 국가’와는 하등 상관 없는 소수 과두들이 통치하는 ‘비민주 국가’에 살고 있다. 군부가 권력에서 물러나고 민간 권력이 들어서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문민정부의 세계화 표방 이후 나라는 급속하게 글로벌리즘의 나쁜 피로 수혈되었을 뿐이다. 국가 주도의 개발 모델이 종료되고 자유화의 물결이 밀어 닥치면서 오직 극소수만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경제구조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민주주의 주술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민주주의 측정 지표를 가져야 할 때가 왔다.  “글로벌 스탠더드” 노래를 합창하는 짓도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국내외 글로벌리즘 추종세력에게 포획된 ‘남의 국가’를 탈환해 ‘우리 국가’로 개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이다.

 

2

그런 측면에서 특정 국가가 서구 글로벌리즘의 경제 그물망에 얼마나 포위되어 있는지 – 그래서 민주주의의 궤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 알고자 한다면 일단 ‘금융의 구조’를 살펴보면 된다. 우리가 97년 IMF 침공 이후 전방위적 포위 상태에 있다면 러시아의 경우는 어떤지 살펴보도록 하자. 조지 워싱톤 대학 정치학과 데이비드 스자코니(David Szakonyi)교수의 글이 러시아 금융에 대해 간결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정보도 풍부하고 나름의 분석과 시긱을 뚜렷이 밝히고 있으니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의 글을 통해 그가 말한 것은 물론이고 그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모두 읽어내는 ‘행간 읽기’를 통해서 러시아 금융지형과 그것이 주는 정치적 함의를 민주주의와 관련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3
기본적으로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러시아가 지금처럼 국가소유 은행을 계속 팽창시키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게 뭐냐구요? 이러다가는 10년 이내에 러시아에서는 민영은행이 완전히 씨가 말라버릴 겁니다. 지금 러시아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요. 국가소유 은행들은 지멋대로 ‘부패’를 저지르며 푸틴 정권을 안정시키는 ‘부정적 역할’만을 하고 있다구요! 이러면 안된다구요! 제발 누가 좀 말려줘요~~~ ”

이런 주장은 서방 학자들이 일심동체로 맨날 하는 얘기다. 글로벌 금융 빨아대는, 판에 박힌 말이다. 아니… 누구 좋으라고 러시아 금융을 활짝 여는가? 얼빠진 국가가 아니라면 글로벌 메이져 민영은행들에 “우리나라 다 털어 잡수세요!”라고 하면서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글로벌리즘에 포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국가가 주권 없는 ‘비민주 국가’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글로벌리즘은 어차피 버는 놈들만 버는 시스템이다. 대부분은 손가락 빨고 날품팔이 프레카라이아트(precariat)처럼 살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우리 모두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4
스자코니 교수는 자신이 사는 미국의 흡혈 뱀파이어 과두금융구조에 대해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마디 언급도 없이 쌩까며, 러시아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개탄한다. 게다가 러시아 국가소유 은행들이 한껏 “부패”를 저지르며 푸틴 정권을 안정시키는 “부정적 역할”만을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은행들이 마치 무슨 도적 패거리나 되는 것처럼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그의 글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준다. 그게 장점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 은행업이 ‘반(反)민영화’ 길로 가며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제시하는 예들이 오히려 거꾸로 러시아 경제나 인민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그가 얘기하는 것을 살짝 각도를 바꾸어 읽으면 그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 글이 되어 버린다. 많은 글을 읽어봤지만 그의 글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5
러시아 은행 현황에 대해 그가 주는 ‘귀중한’ 정보를 챙겨보자.

(1) 2013년 엘비라 나비울리나(Elvira Nabiullina)를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하고 방만하고 무질서한 은행들 ‘청소’ 작업을 시작했다. 은행 숫자가 2013년 956개에서 2019년에는 484개로 확 줄어들었다. 반으로 줄어든 거다.

[이미지1] 러시아 은행 숫자

(2) 현재 국가 소유 은행들이 러시아 전체 은행자산의 2/3를 소유하고 있다.

(3) 2018년 9월 현재 국가소유 은행들이 기업 대출의 80%를 담당하고 있으며, 민간 대출은 70%를 담당하고 있다. ‘싹쓸이’다.

(4)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 그리고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 등과 같은 글로벌 메이저 은행들은 러시아에서 그 존재감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대신 러시아 국가소유 은행들이 투자은행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5) 2018년 7월에 상위 6개 민간은행 중에서 4개가 국유화되었다. 이 4개 은행이 금융 분야 총자산 중 55%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 반면에 러시아의 최대 민간은행인 알파(Alfa) 은행은 단지 4%만을 보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머지않아 알파 은행도 국가소유 은행인 랭킹 2위의 VTB나 랭킹 3위의 가즈프롬 은행(Gazprombank) 둘 중 하나에 매각될 예정이다.

[이미지 2] 러시아의 톱 15개 은행

(6) 은행 국유화가 가져오는 정치적 영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ㄱ) 친서방 반푸틴 “정치적 도전자들(political challengers)”이 선거 자금을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지리멸렬하게 되며 세력이 약화하는 효과가 있다. 즉, “정치적 경쟁”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외부세력이 러시아에서 야당 지원하며 푸틴정권 무너뜨리기 공작을 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ㄴ) 선거 전에 국가소유 은행들이 ‘통 크게’ 기업대출을 해줌으로써 기업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동원해” 친푸틴으로 표를 몰아주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노동자들 입장에서도 회사가 유동성 경색으로 헐떡거리지 않고,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고용주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셈이다.

ㄷ) 국가소유 은행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경제부서가 기획한 핵심 산업에 전략적 투자를 수행할 수 있으며,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래 아직 회복되고 있지 못한 농촌 지역과 단종(單種) 산업 마을에서 활동하는 ‘농업 기업들’에게 집중적으로 대출해줌으로써 이들의 자립을 도울 수 있었다. 글로벌 곡물 메이져들의 이해에 따라 농업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우리와 정반대다.

ㄹ) 국가소유 은행들은 소상공인들에게 대출부채 탕감 프로그램(loan forgiveness programs)을 제공해 줌으로써 정부는 이들로부터 호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상상불허의 꿈 같은 이야기다.

 

(7) 국가소유 은행들은 사업을 다각화해 산업 전반에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특히 IT 산업으로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베르뱅크(Sberbank)가 러시아의 구글(Google)인 얀덱스(Yandex)를 인수한 것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도 어차피 펜타곤 주도로 만들어진 전략적 군사 작품이다. 실리콘 밸리와 펜타곤은 자웅동체다.

필자 생각엔 러시아 또한 은행들과 러시아 군산업체들이 다각적으로 협업해 구글과 페이스북 그리고 유튜브를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지금 한창 만들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개인의 모든 검색정보를 다 털어 빅데이터에 저장해서 언제 우리 뒤통수를 깔지 모르는 지금의 시스템을 우리는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부른다.

[이미지 3] 스베르뱅크의 IT 인수 잔치

6
러시아는 2014년 이후 서방으로부터 제재와 국제 저유가로 경제가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으며 매년 국민소득의 감소 추세를 보인다. 그런데 경제제재를 받지 않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또한 이상하게 경제가 만성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다. 경제 좀 아는 사람들이야 그 이유가 실물경제를 마구 난도질하고 파괴하는 ‘카지노 금융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을 감 잡고 있겠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은 뭐가 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이 부분 집중적으로 설명이 필요하다.

앞뒤 없이 자본주의 타도하자구 해봐야 씨알머리도 안 먹힌다. 글로벌 금융 뱀파이어들이 강제하는 맹독성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작살내기 위해서는 ‘공공금융(public banking)’이 ‘선차적으로’ 필요하다. 이게 바로 우리 경제에 박힌 ‘대못’이다. 생산적 투자는 없고 그저 도박질을 일삼으며 부를 증식하는 모델이다. 그래서 비생산적이고 기생적이고 약탈적이다. 일자리 같은 건 물론 없다.

 

7
경제의 심장인 ‘금융’을 ‘공공화’ 시키지 않고서는 오직 소수 주주만이 세상을 꾸역꾸역 보아뱀처럼 삼켜대는 지금의 엽기 약탈경제는 천년만년 지속할 것이다. 그것을 바꾸지 않고는 털끝만치도 변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자나 깨나 ‘공공금융’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의 구체적 적용을 상상해봐야 한다.

 

8
결국 러시아 금융의 운동 방향은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강제하는 국가들에서처럼 국내 및 해외의 소수 대주주에게로 천문학적 금융 수익이 고스란히 빠져나가는 역겹기 짝이 없는 ‘몬도가네(Modo Cane) 자본주의’를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회주의 시스템의 문화 정치적 ‘아비투스(Habitus)’를 되살려 ‘국가권력’이 갑(甲)이 되어 경제권력이 감히 설레발 치지 못하게끔 하위 파트너로 사냥개처럼 사슬로 묶어 두고 국가를 운영하는 바람직한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선 중국도 마찬가지다. 국가소유 은행들이 실물경제가 원활히 돌아가는 데 곤란을 겪는 분야에 자금을 투여해줌과 동시에 거시적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조를 맞추기 때문이다. 단기수익을 좇아 눈깔이 뒤집혀 별 해괴한 짓을 다 벌이는 헤지펀드 도박자본주의는 우리가 갈 길이 아니며 오히려 하루빨리 폐기해야 할 ‘죽음의 길’이다. 우린 지금 그 길을 걸으며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죽어가고 있다. ㅡ [완정]

27 - 포스팅이 마음에 드셨나요? 왼쪽 하트를 눌러 공감해주세요
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