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완정 시론

I ‘국가전략’을 생각해보는 시간 – (1) I
/ 초국적 브라만 계급의 파놉티콘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

[이미지] 파놉티콘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1
국제정치를 연구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세력이 있다.

만국을 틀어쥐고 있는, 일치단결된 ‘초국적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일단 그들에겐 ‘조국’이 없다. 그들은 유럽 근대사 특정 시점에 마치 재즈 그루브를 타듯 전 지구적 금융과 초국적 메가 기업과 국제 첩보 네트워크와 군사 무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펑키한(funky) 코스모폴리탄 노마드(nomad)다. 펑키하다는 것이 뭔지 알기 위해서 베이스 기타 그루브 연주 한 곡을 들어보자. 펑키한 초국적 멘탈리티를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연주로 대체하자.

 

2
글로벌 금융과 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그들에겐 조국이니 향토애니 하는 것들은 모두 촌스럽기 짝이 없는 토지 붙박이 무지랭이들의 ‘퇴행적 정체성’일 뿐이다. 모더니즘… 삐까뻔쩍한 도시적 세련됨… 그게 다 이들한테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뉴욕, 런던, 파리, 뮌헨, 샹하이, 모스크바… 대도시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상 거의 모든 것이 그들 소유라는 점이다. 뭐랄까, 변형된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들이라고나 할까…

 

3
그들은 자신들이 힘겹게 장악한 지구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최대한 통치하기 편리하게 지구를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결론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파놉티콘(Panopticon)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양식이다. 보통 감옥은 몸과 행위를 감시하고 제한한다. 하지만 시스템으로서 감옥은 몸과 행위는 물론이고 – 지식을 포함해 – 정신과 마음까지도 속속들이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통치 시스템이 된다. 군부독재 같은 조야한 우격다짐 통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교한 시스템이어야 한다. 즉 펑키하게 빨려 들어가게끔 만들어야 한다.

 

4
그들의 전 지구적 파놉티콘 지배 책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더욱 치밀해지고, 더욱 잔인하게 진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적이고 다각적이고 비가시적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피지배자들이 지배를 받는다는 수동적 불편함을 느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아니, 나는 이렇게나 자유로운데, 누가 감히 날 지배해? 그런 헛소리는 나처럼 자유의지로 사는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야, 암 그렇구말구… !!”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주체적 경로’를 따라 사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여야 한다. 물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살짝 얘기가 달라진다. 세상이 너무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고…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늘 쫓기며 불안하고 공허한 허탈감과 외로움 같은 실존적 감정이 수시로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뭔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때도 잦다. 의지할 전통 정신의 뿌리가 뽑혀 나간 황량한 근대 경쟁 사막 한가운데서 생존해야 하는 우리는 그래서 모두 ‘전갈’이 되어야 했다. 아니면 ‘방울뱀’이 되든지… 스르륵 슉 슉… 재빠르게 남 뒤꿈치를 물 줄 아는 방울뱀 말이다…

충절과 신의와 우직함은 전 근대인의 미덕이었다. 반면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근성은 근대인의 미덕이다. 전체주의적인 근대의 평등 이념은 ‘공격적 자아’를 양산한다. 주변을 둘러 보자. 공격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를 ‘외로운 전사’로 주조해내는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를 약탈하며 지배하는 상층 브라만들이 우리를 공격적으로 대한다고 해서 우리는 새삼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보다 공격적이지 못한, 나약한 자신을 책망할 뿐이다. 그래서 지배는 자연스럽게 합리화된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동의’와 ‘수긍’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이렇게 호전성이 보편화되는 것이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다.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는 원래 주관적이라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그러니 그 안에 이미 분쟁이 내장되어 있다. 국가 간 영토 분쟁과 흡사하다. 분명 이곳이 내 소유 땅 같은데 왜 저 꼴 보기 싫은 이방인들이 지들것이라고 우겨대는지 분노가 치민다. 싸워서 빼앗아야 한다. 그러나 싸우기 싫어하는, 호전적이지 않은 많은 유순한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를 포기하고 비자유인 순종[혹은 묵종]을 택해 버린다. 피를 흘리고 적대적 감정을 내면화할 줄 알아야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는 자연스럽게 합리화된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자발적 체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6
가혹한 지배를 당하면서도 그것들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공격성과 호전성이 결핍된 자신의 함량 미달을 탓하며 양자의 화신인 브라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까는 ‘깨갱 통치시스템’, 아마도 대중 통치 시스템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통치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법 높으신 브라만들이 자기 적수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공격성과 호전성을 다른 곳에 투사한다. 만만한 놈을 찾는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터를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축소한다. 그리고 다시 전의(戰意)를 다진다. 브라만 앞에서 내렸던 꼬랑지를 다시 치켜든다. 공격성과 호전성을 회복한다. 비록 자유 쟁취 투쟁의 심급은 낮아졌지만 그리고 비록 우리가 아무리 수드라(천민계급)이고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일지라도 우리 마음 한 켠에는 누구나 ‘소황제’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7
이렇게 우리는 ‘자유’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공격성과 호전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감옥의 통치’에 편입돼 녹아드는 것이다. 비본질적 차이를 가진 개인들과 사회세력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끝없이 사회 전쟁을 벌인다. 같은 천민들끼리 ‘좁쌀’을 얻기 위해 자유 투쟁이 만발하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피라미드 최상층에 있는 초국적 브라만(Brahmin) 계급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어차피 그들은 천상에 있는 존재라 우리 같은 천민들 싸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쎈 존재는 기억에서 지우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게 속 편하다. 맞붙어 싸울 것도 아닌데 그들 존재에 대해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불필요한 지식’이 된다. 이제 피지배자 사고 범주 안에는 시스템의 실질 운영자인 초국적 브라만의 존재는 삭제된다. 대신 돈 몇 푼 받은 찌질한 비리 정치인 – 물론 그것 또한 악임은 틀림없다 – 이 그들에겐 ‘최고의 악마’로 등극한다.

다시 말해 피지배자들은 자기 생애주기를 관통하며 몰아닥치는 개인적 불행 패키지를 선사하는 초국적 거악의 글로벌 시스템을, 체감할 수 없는 지구 자전/공전처럼 여기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공동체 불행이 그로부터 파생됨을 역추론하는 어려운 작업을 포기하게 된다. 자, 이제 정치적 카스트 제도 – 천민은 천민들끼리만 싸우는 – 는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모두 여의도만 바라보게 하고, 모두 청와대만 바라보게 하는 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되었다.

 

8
그러나 돌이켜보면 80년대 이래로 (‘변혁’을 지향하는) 민간 싱크탱크가 주체가 되어 지구정치경제를 거시적으로 파악해 국민국가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전략 로드맵 – 지정학적 방향성/군사동맹/정치제도/경제모델/사회문화적 가치/생애주기별 케어시스템 등을 포함한 – 을 세심하게 도안해보는 총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는 산발적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너무나도 구멍이 숭숭 뚫린 추상적 선언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어땠는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국정 지표가 있었다. 하지만 한결같이 글로벌 브라만들의 지시를 이행하는 것들이었다. 자유화, 개방, 세계화, 민영화, 글로벌 스탠더드…. 뭐 대체로 이런 것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들 모두는 예외 없이 인민을 때려잡고 그들에게 피눈물을 자아냈던 ‘말죽거리 잔혹 프로젝트’였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정부는 ‘언제나?’ 인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 혹은 소수만이 횡재를 하는 – 정책을 입안한다는 것을…

 

9
일례가 작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인공지능(AI) 국가전략: 3대 분야 9대 전략, 100대 실행과제」프로젝트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2016년 8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2차 과학기술전략회의에서 확정된,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만든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질 9대 국가전략」프로젝트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두 개 문건을 차분히 읽어 보면, 결국 동일 인물(들)의 착상을 조금 다르게 옮겨놓은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베낀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국가전략도 뭣도 아닌 그저 기술방향에 대한 ‘얄팍한’ 대응책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게 무슨 “국가전략”인가?? 테크노크라트 공무원 몇 명이 뚝딱 하고 만들어 내는 게 무슨 놈의 국가전략인가 말이다….

 

10
이래서 인민 보편이익을 지향하는 싱크탱크 – 혹은 이를 구축하기 원하는 지식인들 – 는 국가 운영의 총체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누구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국내 브라만 계급에 위탁받은 공무원들과 전문 연구자들은 대체로 국가와 인민 삶을 ‘난도질’하는데 그들 역량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야 브라만 지시를 받는 청부업자들이니 당연히 ‘주인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설계하게 되어 있다. 인민 보편의 이익과는 수천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소수가 국부(國富)와 공적 자산을 진공청소기처럼 강력 흡입해내는 파이프라인을 만들기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11
국가전략이 되려면 적어도 지금처럼 국부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한국을 ‘깡통 국가’로 만드는 핵심적 약탈 요소들을 지적하고 이에 방책을 내놓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미국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상술되어 있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요구들에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1) 국내외 대주주에게로 기업수익이 모두 빠져나가는 걸 언제까지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2) 한미일 동맹으로 워싱톤 네오콘들에게 개처럼 끌려다니는 짓은 언제까지 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문인 주한미군은 이 땅에 천년만년 주둔하게 냅둘 것인가? 또 미국 군산복합체들에 돼두 않는 무기를 사제끼느라 언제까지 국부를 계속해서 헌납할 것인가? 그리고 네오콘이 지휘하는 광란 교향곡인 ‘북한만 비핵화’를 도대체 언제까지 뇌까릴 것인가?

(3) 약탈적 대기업 지배 시스템은 언제까지 그대로 놔둘 것인가? 재벌 일가의 황제 경영은 천년만년 계속되어야 하는가?

(4) 비정규직 고통은 언제 끝나는가? 가족을 지탱하기 어려운 지금 고용구조는 왜 그대로 버려두는가?

(5) 국내 농업을 왜 끊임없이 파괴하는가? 초국적 농업기업들을 위해 우리 농업은 왜 자살해야만 하는가?

(6) 국민화합 차원에서 진작 석방했어야 할 양심수들은 왜 석방하지 않는가?

수도 없이 많지만 일단 여기서 접자. 정말이지 절대 다수 인민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핵폭탄급 중요성이 있는 어젠다는 모두 뭉개면서 국가전략이랍시고 스마트 시티와 AI만 나불거리는 그 저열함에 뭐라 할 말을 잃는다. 우리에겐 왜 정치적 헤라클레스가 없는가? 부족한 우리는 누구와 미래를 상의할 것인가? 외롭고도 외롭다. 정치적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우리 선조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많지 않았던가… ㅡ [완정] (계속)

 

_________

[최상단 이미지] 파놉티콘

29 - 포스팅이 마음에 드셨나요? 왼쪽 하트를 눌러 공감해주세요
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