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러일 전쟁과 제이콥 쉬프(Jacob Schiff) I
2020년 04월 26일 •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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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유대 금융의 대표선수 제이콥 쉬프(Jacob Schiff)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2억 달러를 전비를 융자해 주었다. 지금 화폐가치로 추산하면 45억 달러(= 5조 5,384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액수다. 이 융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깨알처럼 서술한 책을 발견했다. 뭔 내용이 들어 있는지 함께 알아보자.

애덤 고우어(Adam Gower) 박사가 쓴 『제이콥 쉬프와 리스크 관리 기술: 러일전쟁(1904-1905)과 미국의 대일 전비 융자 고찰 Jacob Schiff and the Art of Risk: American Financing of Japan’s War with Russia (1904–1905)』(Palgrave, 2018)이 그것이다.
2018년에 출간되었으니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다. 고우어 박사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직업 역사학자들처럼 연구실에 처박혀 사료(史料)에 파묻혀 지내는 벽면서생(壁面書生)은 아니다. 그는 실물경제 현장에서 30여 년간 부동산, 금융, 은행업에 종사해온 이력을 가진 ‘필드형’ 비즈니스맨이다. 따라서 금융경제에 대단히 해박하며 게다가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사업과 연구를 병행해온 ‘일본통(日本通)’이기도 하다. 그의 최근 비즈니스 활동은 여기를 참조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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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쉬프(Jacob Henry Schiff)는 1904년 4월 파리에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코레키요(Takahashi Korekiyo)를 만난다. 그는 이후 쿤롭사(Kuhn, Loeb & Co.)를 통해 러일전쟁 전비로 쓰라고 2억 달러까지 일본에 대출해준다. 당시 2억 달러는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5억 달러다. 우리 돈으로 치면 5조 5,384억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이 엄청난 금액을 쉬프와 그의 친구들이 일본에 융자해준 것이다. 뭘 믿고 융자를 해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고우어 박사가 친절히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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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 목차를 살펴보자.
제1장 – 머리말(Introduction)
제2장 – 역사적 기술(Historiography)
제3장 – 제이콥 쉬프와 그의 친구들(Jacob Schiff and His Cohort)
제4장 – 일본(Japan)
제5장 – 은행업 비즈니스(The Business of Banking)
제6장 – 영국의 대부업 신디케이트(The English Syndicate)
제7장 – 전쟁 융자(Financing the War)
제8장 – 파급 효과와 결론(Impact and Conclu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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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머리말에서 이 책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나름대로’ 재구성해보자.
제2장 – 역사적 기술(Historiography)
제2장에서는 제이콥 쉬프와 러일전쟁의 관련성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대부분이 그의 대일 전비 융자의 동기를 러시아에 만연한 “포그롬(pogrom, 유대인 학살)”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경제적 동기, 정치적 동기, 그리고 일본에 대한 그의 무한 신뢰와 애정을 모두 포괄해서 보아야 한다. 기존 역사가들은 나중에 나찌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은 일본에 전비 융자를 해준 미국계 유대 금융가의 진짜 속내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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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 제이콥 쉬프와 그의 친구들(Jacob Schiff and His Cohort)
제3장은 주로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쉬프 개인사를 추적한다. 그의 인물됨과 일본에 대한 찬양 수준의 신뢰가 그의 전비 대출 행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된 한에서 그의 비즈니스 거래 범위와 정치적 로비활동을 검토하고, 일본과 커넥션을 가지게 되는 개인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이와 더불어 쉬프가 러일전쟁 직후 일본에 사로잡힌 러시아 포로들(POWs)을 러시아로 송환시켜 그들이 러시아에 돌아가 전제군주 짜르 니콜라이 2세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운동에 복무할 수 있게끔 기획된 훈련 작업에 대해 구체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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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 일본(Japan)
이 장에서는 쉬프와 일본이 결합하게 되는 궤적을 일본 내부 상황을 중심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일본에 쉬프의 대출이 얼마나 요긴한 것이었으며 일본의 미래가 그 자금을 받는 것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밝혀준다. 즉, 쉬프의 전비 대출 자금이 가지는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자금이 일본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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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은행업 비즈니스(The Business of Banking)
제5장에서는 전비 대출과 쉬프의 역할을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당시의 국제뱅킹 비즈니스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즉 당시 국제뱅킹의 특성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을 해줌과 동시에 이 속에서 쉬프의 탁월한 전문성과 운용 능력을 고찰한다. 돈을 끌어모으는 과정이 집중 조명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장에서는 그의 회사 쿤롭이 일반 투자 비즈니스와 비교해 전비 대출 리스크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본다. 대출 총액이 필요 액수 이상으로 과다신청 되었다는 측면에서, 초기에 은행가들이 투자를 망설였지만 결국 그들의 투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투자사례가 당시 다른 투자들과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고찰했다. 당시 국제금융가를 포함해서 쉬프와 그의 신디케이트 동료들과 일반 투자 대중들이 일본 신용도와 리스크를 어느 정도로 평가했는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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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영국의 대부업 신디케이트(The English Syndicate)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은 런던이었다. 따라서 브리티쉬 신디케이트 대부 조직을 살펴보아야 한다. 훗날 세계2차대전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부상함에 따라 금융 중심지 또한 영국에서 미국으로 축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2차대전 발발 대략 35년 전에 제이콥 쉬프가 러일전쟁 대일 전비 융자를 해준 것이 전조(precursor)를 이루었다. 그 사건이 질적 변화의 기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브리티쉬 신디케이트와 뉴욕 은행가들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쉬프의 과감한 전비 융자 결정은 런던을 대신해 뉴욕 금융시장의 세계 지배를 재촉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준다.
미국에 기반을 둔 쉬프의 쿤롭사와는 달리, 브리티쉬 신디케이트는 거대한 융자 규모와 이전에 일본 정부와의 거래에서 생긴 불쾌한 추억 등으로 인해 초반에는 투자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쉬프의 선도 투자를 본 그들은 그를 따라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장에서는 브리티쉬 신디케이트 은행들이 일본과 맺었던 관계를 살펴보고 왜 그들이 그러한 난색을 표명했는지 이유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은행들 특징이 쉬프의 리스크 평가 구성요소로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아보고 쉬프가 어떠한 방식으로 투자 과정을 촉매했는지도 살펴본다.
사실 미국 은행들에게 대일 전비 대출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은행들은 그러한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타국에 대출해 준 전례가 없었다. 일본 또한 국제금융가에서 제공하는 해외 차입에 의존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쉬프의 개인 의지가 개입된다. 그는 일찍이 1872년부터 일본을 상대로 한 대출 영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으며, 일본의 상환 능력을 확신했으며 무엇보다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찬미해왔다. 당시 그 어떤 미국인도 쉬프와 같은 그런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일본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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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 전쟁 융자(Financing the War)
제7장은 융자 시점과 그에 관련된 다양한 주역들을 연관시키면서 전쟁 융자에 대해 개관하고 있다. 쉬프가 대일 전비 융자 협상과 관리에 어떻게 직접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주며, 그와 같은 ‘모험 융자’에서 경제적 성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어떤 동기부여가 그에게 작용했는지 알려준다. 쉬프는 투자 리스크 완화 분석에서부터 융자 전략 실천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全) 영역에 관여해 전(全) 과정을 조율했다.
그의 이 매머드급 투자 프로젝트는 자칫 삐끗하면 그가 평생 쌓아놓은 부와 명성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아무리 금융투자의 귀재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확신에 차 있다 할지라도 천문학적 투자 규모를 상기한다면 그야말로 ‘살 떨리는’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쉬프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모든 세부사항을 정밀하게 점검했다. 물론 그의 투자는 어림짐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광범위한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입수한 최고급 정보들에 기반을 둬 이루어졌다. 전 세계에 그 촉수가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유대 디아스포라 금융/첩보 네트워크는 그 어느 타민족도 따라잡지 못하는 독보적 영역이다. 지금도 전 세계 모든 고급정보가 이들을 향해 집중되고 있고 독점되고 있다. 리스크 없는 투자를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포착하는 물 샐 틈 없는 정보 취득을 전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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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 파급 효과와 결론(Impact and Conclusions)
8장에서는 쉬프의 대일 전비 융자가 일본 국내 정치에 어떠한 정치적 파급 효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 선도 주자로서 근대화 과업을 완수한 이후 ‘갑자기’ 구미 열강 클럽의 일원으로 부상하는데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했는지 분석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쉬프의 전비 융자는 일본 국내 정치 지형을 영토 야욕에 미쳐 날뛰는 침략적 군국주의로 바꾸어 놓았으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주지하다시피, 전쟁이란 무력을 동원한 ‘전쟁(戰爭)’인 동시에 ‘쩐’을 동원한 ‘전쟁(錢爭)’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영향은 실로 대단히 다면적인 것이었다. 첫째는, 일본 금융시장의 국제화를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동하게 만든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일본의 대외무역 패턴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쉬프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는 투자 측면에선 분명 앞으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전대미문의 ‘초대박 특급열차’였지만 동시에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전비 융자의 두 번째 목표, 즉 짜르 니콜라이 2세의 로마노프 러시아를 붕괴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목적은 이루었지만 정치적 목적은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겐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역사가들 해석은 일본과 관계 그리고 일본이 세계적 열강으로 부상하는데 작용했던 쉬프의 역할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데 불충분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제이콥 쉬프가 일본을 우호적으로 여겼으며 일본 국내 사정에 아주 정통한 ‘닛뽄빠’였다는 점과 은행가로서 특유의 부지런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러일전쟁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간과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쉬프가 러일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통상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존재감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려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정치적 야망을 품은 은행가”라는 사실이 더욱 덜 부각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에게는 ‘돈만 벌면 끝’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내면에는 ‘대망(大望)’이 도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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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가 애덤 고우어(Adam Gower)의 『제이콥 쉬프와 리스크 관리 기술: 러일전쟁(1904-1905)과 미국의 대일 전비 융자 고찰』의 주요 내용이다. 참고로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전비를 조달받고 있었다. 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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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승리의 결과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는 데 성공한다.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과관계의 연쇄를 풀어보면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화 과정에서 제이콥 쉬프(Schiff)가 수행한 역할은 그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러일전쟁 종전 후 쉬프는 일본을 방문해 영웅적 환대를 받으며 천황까지 만나서 그로부터 무슨 거창한 훈장도 받는다.
“러일 전쟁 후 1906년 쉬프는 일본 정부 초청을 받아 3월 8일에 퍼시픽 메일 기선 회사의 ‘만츄리아’(만주)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3월 25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그랜드 호텔에 숙박한다. 3월 28일에는 일본 황궁을 방문하여,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하였다. 쉬프는 구레를 견학한 뒤, 5월 3일, 모지에서 조선 제물포로 향한다.” 주3)
이로써 일본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호감이 저변에 흐르게 되었고, 그들이 나찌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었을 때조차도 유대인을 대하는 태도는 독일과는 현저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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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제이콥 쉬프는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일본에 전비를 공여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돈 버는 것 이외에도 “억압과 차별 속에 살아가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대 양대 분파의 생각이 대체로 일치하긴 했으나 “일본에 전비 대출을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집약되는 구체적 문제에 직면해서는 다소 도식적인 분류에 의하면 아쉬케나지 계열의 미국계 유대인 커뮤니티의 대표자 격인 쉬프는 전자를 택했고, 유럽계 세파르딕 유대 과두들은 반대를 표명했다.
즉, 일본에 대한 금융 지원을 거부한 유럽의 로스차일드는 분파적 이해관계에 근거해 행동했다. 이러한 분기는 결국 유대 금융 패권의 중심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근본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던 아쉬케나짐의 득세로 이어지면서 토라를 비롯한 유대 율법서 그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창하는 시오니즘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계기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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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본에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포츠머스 조약 체결은 국제정치무대에서 자국을 일약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획기적 전기가 되었으므로 환호작약할 그 무엇이었음이 틀림없었지만, 쉬프에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어도 그의 정치적 열망과 희망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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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패전하고 러시아제국이 승리하여 조선반도에 러시아 영향력이 강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대신에 ‘아시아의 크림반도’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쯤 러시아말을 사용하면서 러시아 소시지인 깔바싸(колбаса)와 곁들여 보드카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ㅡ [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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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이미지 출처
[최상단 이미지]
https://medium.com/…/the-russo-japanese-war-the-politics-an…
[이미지 1]
미국계 유대 금융가 제이콥 쉬프(Jacob Schiff, 1847–1920)
https://en.wikipedia.org/wiki/Jacob_Schiff
[이미지 2]
『Jacob Schiff and the Art of Risk: American Financing of Japan’s War with Russia (1904-1905)』
https://wordery.com/jacob-schiff-and-the-art-of-risk-adam-g…
[이미지 3]
“일본의 케인즈”, 다카하시 코레키요(1854~1936)
https://alchetron.com/Takahashi-Koreki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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