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번역/서평 · 자료실

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간 전쟁”이 아닌 걸 알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 (1 of 5)

1 세계대전이제국주의간 전쟁 아닌 알기 위해 읽어야 책들 (1 of 5)

 

2020 7 22일〮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1

윌리엄 엥달(William Engdahl),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체제와 그 메커니즘』(서미석 옮김, 길, 2007) 1-5장까지 (19-102)  

 

2

책의 초판은 1992년에 나왔고, 12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원제는 『전쟁의 세기 : 영미 석유정치학과 신세계질서(A Century of War :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Pluto Press, 1992)이다. 책이 영국서 처음 출간된 벌써 28 가량이 세월이 흘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필자가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물론 범상치 않은 책인 줄은 알았지만건성건성 읽었는데, 이것저것 다양한 자료를 읽어 제끼며 국제정치의 맥락을 잡고 나서다시읽으니 그야말로 거의 다이아몬드급 가치가 있다는 깨닫게 되었다. 국제정치학 총론의경전(canon)’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전세계를 지옥으로 만드는 수괴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구체적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고 싶은 이들은 정말이지 책을 밤을 새워, 밑줄을 치며 행간을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것이다. 읽으면 얻는 많을 것이다. 책은 국제정치, 경제에 방계지식이 나름 축적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도움이 되는데, 왜냐하면 깨알같은 사건전개 설명과 더불어 정책 결정 집단의 내부구조를 소상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정보 깊이가 상당하다. 그저 그런 책이 아니다. 공허한 ‘개드립’으로 일관하는 주류 국제정치 관련 잡서 말고 이런 걸 읽어야아카데미적 해탈 있고, 국제정치 분석의 달인이 되는 기초를 닦을 있다. 만약 여러분이 책의 구석구석을 철저히 이해하고 바탕 위에서 다른 방계 지식들과 유기적으로 연결 짓는경지 도달하게 되면, 책을 알지도 읽지도 않은 누군가가 여러분 앞에서 국제정치를 논한다면 여러분은 요실금처럼 흘러나오는실소(失笑)’ 참을 없게 것이다.  

 

3

1 대영제국의 기둥

  1. 제국에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19
  2. 자유무역과 영국 패권의 원동력 21
  3. 영국의비공식 제국’ 25
  4. 1873년의 대공황 29

 

제1장 대영제국의 세 기둥 

 

  1. 자유무역과 영국 패권의 원동력 21

 

1820 영국 의회는 일련의 변화들을 일으키게 원칙의 선언을 가결했는데, 그러한 변화가 가져온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거의 1세기 1 세계대전의 발발과 비극적 여파다.

 

강력한 이익집단인 잉글랜드은행과 베어링브러더스 무역 금융회사의 알렉산더 베어링을 중심으로 런던 해운업계와 금융계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회는 수십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옹호한 개념인 이른바절대 자유무역 지지하는 원칙의 성명서를 통과시켰다.

 

1846 원칙의 선언은 영국의 국내 농업 보호책인 유명한 곡물법이 의회에서 폐지되는 것으로 공식화 되었다. 곡물법 폐지는 자신들의 세계 지배로 결정적인 이득을 취하게 런던의 강력한 금융업계 무역업계의 계산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이득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철저히 밀어붙여야 했다. 만일 그들이 세계 무역을 지배한다면자유무역 다른 저개발 무역국가들을 희생시켜 그들의 지배를 가속화해 있을 뿐이었다.        

 

자유무역이라는 패권 아래서 영국의 상업은행들은 인도터키중국을 잇는 아편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한편 영국 외무성은 아편전쟁 동안자유무역 문호를 개방할 것을 중국에 공공연히 요구함으로써 이들 은행의 이익을 촉진했다.

 

런던 시티의 이러한 강력한 무역, 금융업계의 새로운 주간 선전지인 이코노미스트지가 곡물법 철폐를 선동하려는 분명한 목적에서 1843 창간되었다.  

 

로버트 경이 이끄는 토리당은 1846 5 치명적인 곡물법 폐지를 밀어붙였는데 이는 영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가 더욱 나쁜 쪽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곡물법 폐지로 빗장이 풀린 값싼 농산물이 유입되는 바람에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농민들마저 몰락하게 되었다. 상인들의 단순한 격언인싸게 사서 비싸게 팔자 국가 경제전략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소비가 생산의 유일한 목적처럼 여겨졌다.

 

[[곡물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영국의 국내 농업과 농민들은 파산했다. 곡물법 폐지의 결과로 가장 수출 시장이 식량 가격을 급격히 낮추자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 1840년대 아일랜드 농민들과 가족들의 집단 아사와 집단 이민(1845-46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감자 대기근과 여파) 영국의 이러한자유무역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정책은 그때까지 강력한 자급자족 제조업이 발전하지 못하게 하면서 영국의 수요를 채우는 경제적으로 예속된 곡창지대로 남아 있도록 요구했다. 이제 곡창지대 자체가 허구적인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바람에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1846 이후,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힌두교 농민들이 극도의 최저임금을 앞세워 영국소비자시장을 두고 영국 아일랜드 농민들과 경쟁했다. 영국 내의 임금 수준은 식량 가격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구빈법은 덩어리 가격에 연동된 소득 보전비로 최저 생계 임금 이하로 벌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공여했다. 그래서 식량 가격이 떨어지자 영국 생활수준은 역시 하락했다.

 

[[사실상, 곡물법에 의한 보호가 철회되자 대영제국 도처에서는저임 노동정책 빗장이 풀렸다. 영국에서 초기에 식량 값이 급격히 떨어진 유일하게 이득을 집단은 런던의 거대 국제 무역회사와 그들에게 융자해준 상업은행들 이었다.자유무역 합법칙적인 결과로서 점점 늘어나는 대다수 극빈층과 소수의 엄청난 부유층이 급속히 분리되면서 영국 사회의 계급 분열은 더욱 악화되었다.]] 1

 

당시의 저술가이자 미국의 경제학자로 영국의 자유무역을 강력히 반대한 페샤인 스미스(Peshine Smith) 1850년대 대영제국의 자유무역 패권이 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대영제국의 입법을 여전히 좌우하고 있는 정책이 바로 그러했다. 정책으로 보면 국가는 사실상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사용하기 위한 상품이 아닌 팔기 위한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그러한 상품들을 상대 판매상보다 더욱 저렴하게 팔기 위해 생산비를 낮추려고 노력하는 거대 무역업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자국민에게 지불되는 임금은 특권계급 이익을 잠식하는 손실이라고 생각했다.”2

 

[[페샤인은 애덤 스미스와 학파로 대변되는 영국의 이러한거대 소매점으로서의 국가주의를 1850년대에 특히 독일의 관세동맹 기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국민경제 정책 아래서 유럽 대륙에서 점차 대두되고 있던 국민경제 사상 대비하였다.]] 3

 

그들의 정책을 좌우하는 것은 판매상들의 직감이 아니라 생산자들의 직감이 것이다. 그들은 무역에서의 수익률이 아닌 총생산액을 국가의 부의 기준으로 보게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대국의 강대국들, 관세동맹으로 맺어진 프랑스 러시아 독일 연방은 그토록 오랫동안 영국의 상업정책을 지배해 사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학식과 명망을 겸비한 영국인 저술가 조지프 케이(Joseph Kay) 정책으로 영국이 얻은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영국의 특권 계급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부유하고 강력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직 개화되지 않은 러시아와 터키, 속국인 이탈리아, 제대로 통치되지 못하고 있는 포르투갈, 혁명기의 스페인을 제외한 유럽 어느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억압받고, 빈곤하며, 다른 계층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고, 비종교적이며 교육도 훨씬 받은 상태였다.”4

 

그래서 1851년에는 생산적인 신기술에 과소 투자할 것을 강요하는 교묘한 정책의 실체를 인정하기보다는 인구 과잉에 대한 매우 그릇된 맬서스식의 주장을 이용하며 모종의 캠페인이 영국의 주류 이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잔인한 경제정책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교리에 부여된 이름이 바로 영국의 자유주의였다.]]

본질적으로 영국의 자유주의는 19세기 말에 정의되었듯이, 스스로 통치하도록 맡겨둘 없는무지하고 저속한 대중 대신하여 통치하며 점점 막강해지는 제국 지배층 발전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 정부와 공적인 생활에 몸담고 있는 자유주의 성향의 지배계층의 우선적인 목적은 배타적인 사적 권력의 이익을 유지하고 그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부 그러한 사적 권력은 런던 시티의 극소수 은행가와 기관 수중에 집중되었다.]]  

 

  1. 영국의비공식 제국’ 25

 

(   중  략   )

 

19세기 말 영국 정부는 자신들의 세계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세기 사사분기부터 시작된 새로운 ‘반제국주의’ 시대의 슬로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국은 자신들의 세계 지배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비공식 제국’이라 불리게 될 정책을 통해 훨씬 교묘하면서도 효율적인 형태의 지배네 착수했다. 인도와 극동에서는 제국의 핵심 소유권을 유지하면서, 정식 식민지라는 칭호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다방면의 금융종속이라는 유착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영국의 막대한 자본이 특히 아르헨티나〮브라질〮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피보호 국가들’과의 특별한 경제관계, ‘세력균형 외교’뿐 아니라 ‘영향권’ 등은 모두 19세기 말 영국의 ‘비공식 제국’이라는 이 복잡한 구상에서 비롯된 개념들이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굴복시킨 후부터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특별한 상황을 이용해왔다.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상비군을 육성할 필요성이 크지 않았으므로 그 비용을 해상권 장악에 마음껏 집중할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부를 약탈함으로써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한 러시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나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할 것 같은 나라에 맞서는 동맹을 형성하거나 동맹 형성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   중  략   )

 

1815년 이후, 영국의 대외정책의 독특한 ‘천재성’은 유럽이나 세계의 전략적 강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데 따라 필요하다면 갑작스럽게라도 동맹관계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데 있었다. 영국 외교는 이러한 냉소적 교의를 개발했는데, 이 교의는 영국이 존중받는 독립적인 상대자로서 다른 나라와 결코 감상적이거나 도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전개해 나아갈 것을 요구했다. 영국의 동맹전략이란 엄격히 말해서 자국의 ‘이익’에 최대한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에 좌우되었다. (1)아프리카에서 적재적 관계를 유지해오던 프랑스와 1898년 파쇼다 사건 이후 ‘화친협정’을 맺는 쪽으로 전환한 것이나, (2)오스만튀르크를 오랫동안 지원해오다가 영국과 인도에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알려진 경쟁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봉쇄하는 쪽으로 전환한 것은 그러한 급격한 동맹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중  략   )

ㅡ 영국 자본, 아르헨티나로 유입된 후 경제주권을 빼앗김. 

ㅡ 이 시기 인도로 가는 해상로를 보호하기 위해 먼저 영국 군대는 1882년 이집트를 점령했다. 수에즈 운하가 경쟁 상대국인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영국의 군사점령으로 1882년 이후 이집트의 모든 통치구조는 그렇게 파괴되었고, 영국군은 런던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이 교차점에 영구적으로 주둔했다.    

ㅡ 남아프리카 : 보아전쟁(영국 유대금융업계의 금, 다이아몬드 장악을 위한 보아인 학살전쟁)       

 

영국의 무역 지배를 위한 확실한 독점은 영국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딥 스테이트(Deep State) 

★[[이 시기 영국 비밀정보부의 공작 또한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제국이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영국은 런던 시티의 최고 은행가와 금융가, 정부 내각의 장관들, 국익에 전략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주요 산업 회사의 회장들, 첩보조직의 수장들 사이에 형성된 극도로 복잡한 결합을 바탕으로 워털루 전투 이후 제국을 정비했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한 대표는 런던 상업은행 가문의 후손으로 1928년부터 1963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 은행 이사를 역임한 찰스 조슬린 햄브로 경(Sir Charles Jocelyn Hambro)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햄브로는 독일에 맞서 경제전쟁을 수행하고 윌리엄 케이시(William Casey), 찰스 킨들버거(Charles P. Kindelberger),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 로버트 루써(Robert Roosa), 후일 케네디 정부의 재무차관이자 월스트리트의 고위관계자 브라운 브러더스(Brown Brothers)의 파트너인 에이버럴 해리먼(William Averell Harriman)을 비롯하여 전후 미국 중앙정보국의 지배층이 될 전체 수뇌부를 훈련시킨 경제전쟁부 산하 영국 비밀정보부의 특수공작집행부(SOE) 실무 책임자였다.  

 

영국의 비밀정보부는 외국의 수도에서 활동하는 첩보요원들에게서 정보를 입수하는 옛 방식보다는 영국의 은행, 해운, 산업, 정부의 막대한 권력을 한데 엮는 프리메이슨 같은 조직망으로 은밀히 운영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비밀이었으므로 쉽게 속아 넘어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외국 경제기구들에게 막대한 힘을 행사했다.]]

 

[더탐구] [[ 위의 언급은 대단히 중요하다. ‘공익국가’가 아닌 ‘마피아국가’의 원형이 영국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딥스테이트(deep state)’이다. 이러한 정교한 형태의 과두지배체제를 단순히 ‘자본가계급의 국가’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국가 내에 사적 국가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특유의 이원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대단히 허술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정확히 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 뿐이다. 합법적 국가조직 위에 덮어쓰기 형식으로 거대권력의 비합법 사적 네트워크가 능구렁이처럼 칭칭 감겨 있는 조직형태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금융과두를 정점으로 하는 소수 과두의 국가 포위 조직방식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전해와 오늘날 미국 또한 선거권력이라는 표면권력 속에 ‘사적 국가’가 실질적 정책 결정을 삼투시키는 심층국가의 조직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앵글로-아메리카 과두지배계급 네트워크의 국가 관리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줄을 모른다.]] 

 

1846년 이후 자유무역 시대에 민간 상업권력과 정부가 이렇게 암암리에 손을 잡은 것이 영국 패권의 비결이었다. 영국의 대외정책은 동맹국과 선의의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산된 ‘이익’을 관철시키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동맹관계나 우방국을 바꿀 수 있었다. 

 

  1. 1873년의 대공황 29

 

그러나 이렇게 자유무역으로 전환한 직접적인 결과로 1870년대 영국에서는 금융공황에 이어 심각한 경제불황이 시작되었다. 자유무역주의 교의는 세계의 모든 주요 무역국가들도 영국과 동일한 경제정책을 펴도록 영국이 확실한 영향을 미칠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그러한 동질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857 런던에서 심각한 금융공황이 발생한 잉글랜드은행의 이사들을 비롯한 런던 시티의 금융 지배세력은 런던의 은행들에서 향후 또다시 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새로운 방책을 결의했다.

[[1857년의 공황은 잉글랜드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국제 준비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 원인이었다.]] 예금 인출사태로 런던과 영국 전체에서 은행의 여신이 붕괴되었다. 영국 당국은 위기에 대응하여 단순하면서도 다분히 위험한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귀결될 정책을 고안했다.

 

당시 정부의 통제가 아닌 런던 시티 금융기관들의 통제를 받고 있던 민간지주회사 잉글랜드 은행은 영국의 준비금을 고갈시킬 가능성이  있는 경쟁 무역 상대국보다 중앙은행의 할인율이나 이자율을 상대적으로 충분히 높게 올리기만 해도 금의 유출이 중지될 것이고, 경쟁국보다 상당히 높게 올린다면 유출되던 금이 결국 베를린이나 뉴욕, 파리나 모스크바에서 런던의 은행으로 다시 유입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금리정책은 중앙은행의 강력한 무기였는데, 이로 인해 잉글랜드 은행은 경쟁자들에 대해 결정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이자율이 제조업과 농업에 엄청난 불황을 몰고 와도 상관하지 않았다. 1846 곡물법 철폐 이후 영국 경제정책의 주류는 산업이나 농업이 아니라 금융과 국제무역으로 점차 바뀌었다. 영국 국제은행의 우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은행가들은 1960년대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에서 일어났던 못지않게 국내 산업과 투자를 기꺼이 희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은행의 이러한 새로운 금리정책이 영국산업에 미친 결과는 1873 영국을 강타하여 1896년까지 지속된 대공황이라는 보복이 되어 되돌아왔다.]]

 

영국 은행계의 금융위기로 시작되어 남북 아메리카 철도 건설을 위한 해외대출의 피라미드 조직이 와해되면서 대영제국은 당시 대공황이라 불리던 상태에 접어 들었다. 치솟는 실업률과 불황으로 빚어진 산업 도산을 반영하며 영국의 물가는 1873년에서 1896년까지 끊임없이 떨어져 명목가치로 거의 50퍼센트나 하락했다. 실업 또한 만연하게 되었다.

 

영국 제조업에 대한 투자 자본 부족은 이미 1867 국제 박람회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완전히 새로운 기계 제조업자가 생산한 제품들과 심지어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섬유조차도 불과 20 세계를 선도하던 영국 제조업 기술 수준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확실히 보여 주었다. 영국의 철강, 석탄 다른 제품들의 수출은 시기에 감소했다. 그것은 30 곡물법 폐지와 함께 시작된자유무역 금융을 제국의 최대 관심사로 만들기 위해 영국의 산업기술을 쇠퇴시켜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영국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영국이 세계 산업국가들을 수월하게 선도하던 시대는 1890년대 무렵 완전히 끝이 났다.]][1]

 

19세기 대영제국의 자유무역주의와 그에 대한 멜서스식 합리화는 결국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무역주의는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세계의 점증하는 지역의 경제를 집어삼키는 기초하고 있었다. 곡물법이 폐지된 불과 25 만에 대영제국은 그로 인해 자국 역사상 최악의 장기 불황에 빠졌다. 1873 이후영국발 질병 애덤 스미스가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범세계적 경제 모델이라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영국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독일이 이끄는 유럽 대륙의 나라들이 과거 2 동안 가장 눈부신 산업 성장률을 기록할 있게 만든 일련의 국민경제 보호주의적 조치를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계에서 제국과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두고 영국 지배층 사이에 새로운 논쟁을 야기했다.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은 1882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 도입되었다. 이제 논쟁은 영국의 제해권을 계속 유지할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 이야기

2 점점 다가오는 전선

독일과 세계대전의 지정학

독일의 경제 기적 32

베를린 은행 공황 36

선박과 철도 기간망의 필요성 38

 

후주

[1] 현재의 미국의 상황과 일치한다.

24 - 포스팅이 마음에 드셨나요? 왼쪽 하트를 눌러 공감해주세요
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