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과 자본주의 – 근대 담론의 ‘정신적 봉쇄’부터 풀어야
2020년 12월 8일 · 신현철/국제정치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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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경제적 기초는 수도원의 공유재산을 군주가 싹쓸이 털어가는 ★사유화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군주제 국가(인민 왕정)가 국가 통치 행위에서 다양한 계층의 이익에 최대한 조화를 부여해주는 ‘정치적 기능(결단의 기능)’이 후퇴하고 경제적 “합리성”이 전면에 대두되는 자본주의적 ‘과두제 국가’로 가는 통로를 열어주었다. 일찍이 영국의 헨리8세 때 카톨릭 공유재산을 소수 몇 개 가문이 분할해 가짐으로써 시작된 유럽 국가의 과두화는 전(全)유럽에 카톨릭에 반대하는 종교개혁의 회오리를 불러 일으켜, 유럽이 구교와 신교로 양분되어 피바다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군주들의 경제적 이기심이 기본 원인이었겠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유대 카발리스트 랍비들이 기독교를 유대화시켜 신학적 변형을 일으킨 것도 크게 한 몫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개혁의 상징적 인물인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 작업을 위해 유대 랍비들을 뻔질나게 만나 성경 해석에 관해 많은 자문을 구했고, 그 자신도 성경을 랍비들 구미에 맞게 ‘제멋대로’ 해석한 카발라(Kabbalah)에 심취하기도 했다. 칼뱅 같은 이는 아예 유대 혁명 전복신학을 주장했던 전투적인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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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중요한 것은 전(全)유럽이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양분되어 ‘30년 전쟁’ ㅡ 1618-1648: 시기적으로 보면 조선조 인조 재위기간(1623-49)과 엇비슷하다 ㅡ 이 일어나, 유럽 대륙이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처참하게 황폐화되고 망가지던 상황은 당시 군주들을 상대로 전비를 대출해주며 군납 비즈니스로 이익을 챙겼던 유대 금융가와 상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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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618년 전쟁이 발발하자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유대 금융가 죠셉 바세비(Joseph Bassevi of Prague)에게 전쟁 자금의 대출을 요청했고, 바세비는 이에 응하는 대가로 제국의 화폐 주조국을 임대받아 주화의 질을 저하시켜 발행함으로써 자신의 대출분을 메꾸었다. 사실상 30년 전쟁 와중에 전쟁 당사국들이었던 중유럽과 스칸디나비아의 주요 국가들은 모두 예외 없이 전쟁 수행을 위해 유대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1] 따라서 전쟁의 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비례해 유대 금융가들과 군수품 납품업자들은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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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절대주의 왕정 국가들에게 유대 금융업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당시 국제금융의 대명사는 로스차일드 혈족이었으며 이들이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만큼 압도적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의 마이어 암쉘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of Frankfurt)는 신성로마제국의 헤세-카셀의 선제후 윌리엄 9세의 금융 에이젼트(대리인)였으며, 이스라엘 아론(Israel Aaron) 과 곰페르쯔 가(Gomperz family)는 프러시아의 호헨쫄레른 통치자들에게 그리고 베렌드 가(the Behrends)는 하노버와 레만 삭소니에게, 프에르스트 가(the Fuersts)는 쉘레비히-홀슈타인, 멕클렌베르크 그리고 홀슈타인-고토르프에게, 골드슈미트 가( the Goldschmidts)는 덴마트 황실에 각각 금융 써비스를 제공했으며, 스웨덴의 구스타브스 아돌프스는 그의 군수물자 납품을 모두 유대 상인에게 맡겨두었다.[2]
30년 전쟁은 그야말로 유대 상인과 금융업자들에게는 ‘30년 간의 쉼 없는 잔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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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라는 허구적 이야기 구조물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는 2가지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무슨 숭고하고 고매한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여 “타는 목마름으로” 순전히 종교적 의도로 약자의 입장에서 카톨릭과 싸운 것이 아니라(우리는 그렇다고 속아왔다), 실상은 길드(guilds) 체제와 공조하며 분배경제(혹은 도덕경제)를 실행해왔던 카톨릭교회가 교회법 상 금지하고 있었던 고리대금업(이자로 인간 노동을 도둑질해가는 패륜적 관행)을 국가 승인의 ‘정상적’ 경제활동으로 탈바꿈시켜 ‘돈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체제의 사회질서를 ‘리셋(reset)’시켜야 했다. 종교 혁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이자를 통해 노동을 갈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국가를 뚫고 합법 영역으로 들어가 안착하는 순간 탐욕의 자본주의는 해당 국가를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영국에서 초기 자본주의 기간에 보였던 패륜적 아동노동 같은 것은, 이전 카톨릭 왕정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800년대 빅토리아 시절 그 당시 공장에 묶여 노동으로 죽어갔던 어린이들을 보면[3], 자본주의라는 게 정말로 ‘악마가 만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알아야 할 것은 카톨릭 도덕경제를 파괴하는 것이 시간상 먼저 벌어진 것이고 이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가면을 뒤집어 썼다는 점이다. 경제 범죄를 저지른 후 종교적 알리바이(alibi: 현장부재 증명)를 만들어 끼워다 맞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을 얘기하면서 카톨릭 수도원 경제 파괴와 공공재산 사유화 그리고 자본주의적 과두제로의 이행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엉터리 종교개혁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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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현세적 금욕주의”니 “소명”이니 뭐니 하면서 “자본주의 정신”의 결정적 요소가 칼뱅주의의 종교 윤리의 부산물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는데, 일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정신”을 거부하는 “비합리적”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신학적 무기로서 유대화된(Judaized) 혹은 ‘선민(elect)’이라는 ‘유대인 우월주의’를 고스란히 판박이 해서 “우리만이 선택된 자들이고 카톨릭은 악마니 쳐부수자!”로 압축되는 칼뱅주의 ㅡ 퓨리턴이즘도 포함해서 ㅡ 의 본질과 종교개혁의 ‘깊은 속셈’을 간파해내는 데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1907년 작 『유대인들과 근대 자본주의(Jews and Modern Capitalism)』[4]를 읽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도대체 유대정신(Judaism)의 그 무엇이 그들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 마치 마이다스의 손(Midas touch)처럼 – 계량적, 산술적 자본주의적 합리성으로 귀결시켜버리는지 체계적으로 논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좀바르트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이 (1)유대인들의 정신적 특성과 자본주의의 친화성, (2)유대교와 비즈니스와의 밀접한 관련성 그리고 (2)유대인들의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책은 너무나 많은 정보와 통찰을 던져주기에 되새김질하며 수 차례 읽어야 할 만큼 가치가 큰 역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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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1) 프로테스탄티즘 발흥의 경제적 배후라든지 (2) “유대인 없는 유대교”인 퓨리턴이즘과 칼뱅이즘이 종교전쟁의 외피를 두르고 카톨릭 왕정과 ‘경제전쟁’을 벌인 실제 역사 과정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바르트 또한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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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분야도 미디어 분야만큼이나 ‘프레임 독재’로 점철되어 있다. 기존 담론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죽일 듯이 달려든다. 백날 읽어봐야 별 영영가 없는 막스 베버는 무슨 ‘신적 권위’를 가진 것처럼 추앙을 받는다. 이유는 뻔하다. 자본주의에 대해 별다른 시비를 걸지 않고 오로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에 뭔가 고상한 것이 있어 보이게끔 윤색하고 그것들에 금욕주의, 직업적 소명, 근면 등의 키워드(핵심어)를 연결시키며 ‘이미지 세탁’을 능수능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심오한 척 온갖 ‘개폼’을 다 잡지만 막스 베버는 결국 자본주의 빠는 이데올로그에 불과하다. 그래서 많은 영향력 있는 자본주의자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지배 메커니즘(작동 기제)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그가 공헌한 바는 극도로 미미하다. 그저 표면정치 권력을 분석하는데 몇 가지 개념 도구를 준다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모두들 그에 열광한다. 막스 베버의 프레임에서 보면 그가 대단히 훌륭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그가 하찮게 보인다. 특정 학술 스타의 프레임 독재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저 부지런히 우량 도서를 발굴해 읽고 토론하며 사유 지평을 넓혀가는 것 뿐이다. 하나의 고정된 각도로만 볼 것을 강제받는 교육을 받으면 특정 프레임에 중독되게 마련이다. 시야를 확장하고 프레임을 허물 수 있는 자기완결적 논리구조를 갖추려면 많이 공부하고 많이 생각하는 것 외에 딴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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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존스(E. Michael Jones) 박사는 『불모의 금속: 노동과 고리대 이자 사이의 투쟁으로서 자본주의의 역사(Barren Metal: a history of capitalism as the conflict between labor and usury)』(Fidelity Press, 2014)에서 진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준다. 속임수를 쓰거나 프레임을 걸지 않으면서 아주 꼼꼼하게 자본주의의 역사를 서술해 나간다. 이 책은 자본주의 통사라기 보다는 자본주의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정치 투쟁사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유럽사에 대한 시각 교정서로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쓴 책이다.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중세말 근대초 서술 부분에서 “봉건적 생산양식이 생산력 발전에 저해가 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했다”는, 사적유물론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테제가 얼마나 판타지(공산, 몽상)에 입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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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파괴의 다른 이름인 “종교개혁”의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 계산’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책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세 수도원 경제(노동위주의 분배와 윤리성을 기본으로 했던)의 파괴에서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이 “역사발전의 합법칙적 전개”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단지 고리대금 이자 방식으로 노동을 빼앗아, 그간 삶의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로 존재했던 중세 도덕경제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가난과 궁핍과 인간 황폐화를 안겨주었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초국적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 금융업자들이 주축이 된 범유럽의 금권세력이었으며 그들이 다각적으로 카톨릭에 흠집을 내 균열시키면서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어 전쟁 비즈니스로 한 몫 단단히 챙기게 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무슨 수학 공식 외우듯이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라고 읊조리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반지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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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문명의 근간’이다. 신이 있네 없네 하는 존재론적 저열한 야바위에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을 정도의 지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무한히 용솟음치는 탐욕을 절제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라는 성인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 말라는 고리대금업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피 빛 자본주의로 세상을 물들여 지배하기 위해서 프로테스탄트 맘몬(mammon, 물질욕의 화신) 승냥이떼들은 카톨릭 분배경제를 이빨로 물어뜯으며 공격했고 나중에는 급기야 이에 앞장 선 프로테스탄트 군주 자신들도 유대 금융업자들의 ‘세계제국’을 앞당기기 위한 정치적 용병인 자유주의 비밀조직의 봉기에 뒤통수를 맞고 “혁명의 시대”에 모두 처참하게 몰락하고 궁극에는 군주제 자체가 절멸 당하기에 이르렀다. 군주제 대신 들어선 것은 과두제의 다른 표현인 ‘공화제’였으며, 그에 더해 종교와 교육을 분리시켜 ‘자유주의 종교’와 ‘의회민주주의 종교’를 ‘좋은 것’, ‘진보적인 것’이라며 사람들 머리 속에 속임수를 써가며 쑤셔 넣고 실제로는 안 보이는 곳에서 지들끼리 담합해 마피아식 조직을 세계적 차원에서 만들어 재물을 갈쿠리로 긁어 모으고 뭐가 뭔지 모르는 선량하고 무력한 형제 자매들을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 쑤셔대는 이 잔혹한 세상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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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도 모자라 “그레이트 리셋”이라며 사람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묶어두고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근대 세속주의 무신론은 실제로 가장 악랄한 “자본주의 종교”다. 역사의 흐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지적 게으름을 부리며 살아온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운명은 이처럼 ‘비극적’이다. 모든 것이 봉쇄되어 가고 있는 지금, 이미 늦었지만, 아예 완전히 늦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역사의 흐름에 역류해 ‘정신적 봉쇄’로부터 풀려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도 새로이 감행되는 리셋의 구렁텅이로 –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 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ㅡ [완정]
[1] BENJAMIN GINSBERG, 『The Fatal Embrace: JEWS AND THE STATE』(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p. 17
[2] ibid. p. 17
[3] https://victorianchildren.org/victorian-child-labor/
[4] 이 책은 우리말 번역본이 없다. 자본주의 이해에 필수적인데 왜 번역본이 없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자본주의를 역겨워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본질을 언급한 명저가 주목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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