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택의 음악산책

[음악산책] 저항 음악, 포크뮤직 그리고 필 옥스– 아메리칸 포크 뮤직 (3)

이미지= KimRuehl.com

 

저항 음악, 포크뮤직 그리고 필 옥스 -아메리칸 포크 뮤직 (3)

정진택/큐레이터

 

킴 루얼(Kim Ruehl)이란 사람이 있다. 아메리칸 포크뮤직 평론가로 빌보드와 NPR(미국 공영라디오방송)에 글을 쓰고 그녀 자신 포크뮤직 싱어-송라이터이다. 그가 1960년대 아메리칸 포크뮤직 부흥운동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저항 뮤지션 10명을 꼽은 적이 있다. 전편에서 살펴본 피트 시거가 5위, 1963년 워싱턴DC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역사적 집회에서 오, 프리덤!을 절창한 존 바에즈가 3위, 그리고 모던 포크뮤직의 아버지 우디 거스리가 2위에 선정되었다.
노벨상까지 받은 밥 딜런은 그의 음악적 변신 때문인지 이들 10명의 면면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럼 과연 이 전문가가 뽑은 미국에서 가장 정치·사회 문제에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무장한 뮤지션은 누구였을까?

미국의 포크뮤직은 늘 사회문제와 함께 있었다. 짓눌린 흑인 노예의 삶, 땀과 피에 쩐 노동자의 운명은 포크 음악의 토양이어서, 자유의 나무가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이 음악의 줄기에도 삶의 진한 내음이 배어있다. 여기에 여성참정권, 시민권, 반전운동, 여권운동, 환경운동 같은 다양한 이슈가 가사 내용을 풍성하게 하면서 연대와 동참을 부추기는 멜로디를 끌어냈다.
1960년대 흑인 인권문제와 베트남 전쟁은 모던 포크의 부활을 가져온다. 60년대 저항의 정신이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미국의 국제정치와 인종차별주의와 충돌할 때 포크뮤직의 천재들이 존재를 드러냈다. 피트 시거가 우디 거스리의 정신을 이어받고 밥 딜런,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메어리 등이 대중의 음악적 감수성을 끌어안으며 포크음악을 다시 꽃피운 것이다.

필 옥스(Phil Ochs).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포크 가수가 아니다. 1940년생으로 밥 딜런(‘41년생)과 거의 동년배인 옥스는 쿠바혁명에 관심 깊은 정치와 저널리즘 지망생이었다. 급진적 기사를 쓰고 학교신문이 그의 기사 게재를 거부하자 자신의 지하신문 “The Word(말)”를 창간한다. 하지만 음악적 소질을 숨기지 못해 이내 대학친구와 포크 듀엣 ’노래하는 사회주의자(the Singing Socialists)’를 결성한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젊은 포크 뮤지션들 그룹에 모습을 나타낸다. 거기엔 로버트 짐머만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뿐 아니라 헤어스타일, 담배 피우는 폼까지 닮으려 했던 장래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옥스는 절친한 사이가 된다.
두 포크 뮤지션은 우호적이면서도 팽팽한 경쟁 관계를 유지하는데, 딜런은 옥스에 대해 ‘따라잡기 어려운 존재’라면서도 ‘포크싱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라고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딜런이 전자기타를 들고나와 포크계의 비난을 한몸에 받을 때 옥스는 오히려 딜런의 음악적 용기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60년대 중반 이들은 나란히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초청되었고 당대의 포크 싱어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대중들은 인권 집회나 반전 시위, 콘서트 홀 등 다양한 장소에서 옥스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I Ain’t Marching Anymore(1965), Changes(1966)와 같은 노래들을 목청껏 따라 부른다.
 

필 옥스- “I Ain’t Marching Anymore(난 더는 진군하지 않아)”

필 옥스- “Changes”

1968년은 반전과 평화, 젊음과 인권의 시대정신을 세계에 선사한 해였지만 아메리카는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야만의 땅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닉슨류의 정치와 군산복합체는 기승을 부렸고 저항가요의 가사 또한 거칠어진다. 그 와중에 옥스는 특유의 독설로 노래한다. “케네디 저격 땐 아버질 잃은 듯 절규하지만 말콤 엑스의 죽음엔 별 반응이 없고, 흑인을 사랑하지만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건 예외. 피트 시거 콘서트 가서 모금에 돈도 내지만 제발 따라나서라곤 하지 마”( Love me, I’m a liberal-사랑해 줘요, 난 진보주의자)
필 옥스- “Love me, I’m a liberal(사랑해 줘요, 난 진보주의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발 빼려는 파리 평화회담, 거리 시위의 철저한 진압이라는 미국 정부의 양동작전이 먹혀들어간다. 거리의 저항 인파가 줄면서 포크뮤직의 저항 톤도 낮아진다. 우울한 70년대가 시작된 것.
옥스의 음악도 변화가 일어난다. 컨트리와 록이 섞이면서 그는 결심한다. “부분적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 그러나 여전히 부분적으로는 체 게바라” 그리고 사회변화와 더불어 관심의 폭도 넓혀나간다. 1970년 밴쿠버에서 그린피스 출범 자선 콘서트에 조니 미첼, 제임스 테일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옥스가 감당하기엔 벅찬 변화들이었다. “Changes”의 아이러니… 그를 사랑했던 대중들도 이 같은 변화 속에 하나둘 떠나면서 술과 약이 몸을 망가뜨리기 시작했고 조울증이 괴롭혔다.
그래도 옥스를 감동시킨 변화가 있었다. 1970년 칠레 아옌데 좌파정권 집권 소식을 듣고 이듬해 산티아고로 날아간다. 그곳엔 처음 만나지만 한눈에 음악적 동지임을 확인한 누에바 칸시온의 대표주자 빅토르 하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우정은 그러나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막을 내린다. 아옌데의 자살과 하라의 비참한 죽음에 분노한 옥스는 그의 동료들- 피트 시거, 밥 딜런, 앨로 거스리(우디 거스리의 아들)-과 함께 칠레의 상황을 대중에게 알리는 자선 콘서트 “살바도르 아옌데와의 저녁”을 연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 옥스는 5월 11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마지막 집회, “The War Is Over-전쟁은 끝났다“를 연다. 이미 이때를 준비한 듯 1968년에 만든 자신의 노래가 집회의 표제어가 됐고 10만명이 운집한 이 집회는 바로 그 노래로 끝을 맺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는 진정한 선언이었지만 힘겨움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필 옥스 – The War is over(전쟁은 끝났다.) 1975, 뉴욕 센트럴 파크

하라의 죽음과 베트남 전쟁의 종식은 옥스에게도 마침표로 다가온 듯하다. 무기력, 조울증, 피해망상, 알콜 중독, 노숙생활. 좌표 잃은 삶이 가져다주는 거의 모든 것들 속에서 1976년 4월 옥스는 목을 매 자살한다.
그가 죽은 뒤 밝혀진 500페이지 분량의 FBI 파일에서 옥스는 ‘반문화적 인사, 저항시위 조직가, 뮤지션, 그리고 체제 전복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등장한다. 대체로 맞는 것 같은데 옥스가 원했고 밥 딜런도 동의했던 프로필이 빠져있다. “저널리스트.”

필 옥스의 매력을 느낀 이들을 위한 추천곡들 – When I’m Gone/ There But For Fortune

 

◇ 글쓴이: 정진택

학예사(큐레이터)로 고미술 전시분야 전공이다. 우리음악 탈춤 영화시나리오 등에 조예가 깊으며 우리음악과 세계음악 특히 제3세계 비주류음악에 대해서도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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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愛不需要裝乖 謝和弦 (ft.王詩安) 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