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정치 · 외부 칼럼

[외고] 화룡현 약수동 박상활 열사

이미지 © 김대규 / 박상활 열사 기념비

 

화룡현 약수동 박상활 열사

김대규/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연변 화룡현 약수동 마을에 오래전 버드나무를 심은 이가 있었다. 서로 살린다는 뜻을 가진 ‘박상활’ 이름 그대로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청년이었다.

스물 한 살 약관의 나이 (1924년)에 상활은 항일투쟁에 나서기를 결심하고 투신의 뜻을 다지고 기리기 위해 자기 집 앞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상활의 버드나무는 일제 토벌대들이 마을을 불태울 때 함께 타버렸다. 그러나 상활의 모친 안씨가 아들의 혼이 담긴 나무를 보물처럼 가꾸어 다시 살려냈다.

봄마다 푸르러지는 버드나무에서 박상활의 낙관적 세계관과 의지가 엿보인다. 투쟁은 나와 가족 그리고 민족의 ‘살림’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활은 ‘살림’을 위해 항일 투쟁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는 1936년에 동북항일연군 제1군 2사 군수부장으로 있었다. 1937년 초 제6사(사장 김일성)로 파견받아 가던 중 심각한 동상을 입었다.

천연 바위굴에 자리 잡은 유격대 병실에는 별다른 약품이나 의료장비가 없었다. 병자를 위한 임시 대피 공간에 불과했다.

썩어가는 발을 내버려둘 도리가 없자, 박상활은 통조림 깡통을 펴서 가위로 잘라 톱을 만들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두 발을 잃더라도 나는 살아야겠소! 살아서 끝까지 항일하겠소! 이제부터 함께 절단 수술을 합시다”

삼일 밤낮(또는 6일 밤낮)을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면서 박상활은 자신의 두 발목을 기어이 잘라냈다고 한다.

하지만 변절자의 신고로 유격대 병실이 일제 토벌대에 노출되었다. 다리를 잘라 낸 박상활은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 무릎으로 동굴을 기어나가 총을 들었다. 동료들이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박상활은 1937년 12월경에 토벌대의 총탄에 산화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 화룡현 투도진 약수동에 있던 조선인 마을은 사라져 밭이 되었다. 그러나 연푸른 버드나무 곁에 ‘박상활 열사 기념비’가 변함없이 서 있었다. [완정]

 

이미지 © 김대규 / 박상활 열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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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Maintenant ou jamais (feat. Dry) TAL 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