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정치 · 완정 시론

“문화 혁명”을 보는 눈

문화혁명”을 보는 눈

 

기사비평

 

I

일단 “문화 혁명”이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알아보자.

 

“1966년 8월7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 제11회 총회 회의장에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 한 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배포해 “반동 자산계급의 입장에 선 몇몇 지도자 동지”를 비판했다. 마오의 ‘대자보’는 문화대혁명을 촉구한 <인민일보> 사설과 베이징대학 대자보를 언급하면서 “어쩌면 이토록 훌륭하단 말인가”라고 찬양했다. 마오는 총회 직후인 8월18일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찬 것을 시작으로 그해 1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전국에서 온 홍위병 1000여만명을 접견해 ‘조반’(造反)을 선동했다. 대약진운동 참패로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마오는 1965년 말부터 측근 ‘4인방’을 앞세워 문화대혁명 여론을 조성해왔던 터였다.

 

그 뒤의 장면은 다 아는 바고, 보는 그대로다. 홍위병들은 최고권력의 손짓대로 류사오치 국가주석 등 지도자들을 타도 대상으로 삼고 떼로 덤벼들어 실각시켰고, 심지어 죽게까지 했다. 마오가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은 극심한 혼란과 퇴보를 겪었다.”[1]

 

II

그렇다면, “문화 혁명”은 왜 일어난 것일까? “문화적이지도 않고 혁명도 아닌” 문화 혁명의 발생 원인으로 추정되는 4가지 요인을 짚어보자.

 

1 – 대약진 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희생양’을 찾던 사회심리

중국서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우는 소련식 산업화집산화 정책이 실패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오가 숙청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마오가 누군가? “중국의 붉은 아닌가! 그가황제의 지위 선뜻 내어놓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중국의봉하마을 낙향했더라면 문혁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대신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튼 권력이란 그런 아니었다. 마오는 문혁을 통해 아래로부터 대중을 동원해 권력을 회복했다. 대신 중국은 마오가 죽기 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테러국가 10 경험했다.(1966~1976)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스탈린주의적 정책모델(농촌 잉여를 산업에 퍼부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겠다는 경제노선) 중국에서 실패한 거다. 기술도 자본도 산업 인프라도 없는 중국에서 농촌의 잉여생산을 수탈해 신속한 공업화를 해보려고 시도가 폭망한 것이다.(러시아에서도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은 동일하게 목격된다.) 중국은 뭔가 다른 방식의 산업화 시도를 했어야 했다. ‘중국 특색의근대화 방안을 모색했어야 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이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튼 마오는정치적 위기 몰리게 되었고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 절치부심하고 있던 차에 문혁을 벌인다. 이후 문혁은 마오 개인을 찬양하는 개인숭배종교 비스무리하게 흘러갔다.   

 

문혁으로 중국경제는 다시 한번 파탄이 나고, 비단 경제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퇴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2 –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중국역사가 빚어낸 호전적 사회 정서 

청조 붕괴→군벌의 난립신해혁명항일전국공 내전… 맨날 치고 패고 죽이는 전쟁에 쩔어 살다 보니 사람들 정서가 온전할 리가 없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문혁은 이에 불을 당긴 것이다.    

 

3 – 저발전 사회의 미분화에 따른 ‘정치 함몰적’ 분위기

정치 말고 딱히 관심을 둘 흥미로운 일이 없는 미발전된, 미분화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대거 정치에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전 인민이 정치에 매달려 ‘혁명가’가 되려 하는 ‘정치 과잉의 시대’가 문혁 시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정치 말고도 너무나도 많은 관심거리가 생겨서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적어졌다. 사회가 발전되면 체제를 불문하고 그만큼 탈정치화 현상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국은 고도로 복잡해진 관계로 문혁 시기 때처럼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다. 시스템이 복잡해졌고 따라서 ‘테크노크라트 정치’가 일반적이다. 개나 소나 참여할 수 있는 게 정치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탈정치화는 서구국가들 못지 않다. 문혁 세대의 자식들인 80년대 태생 바링허우(八零后)와 90년대 태생 주링허우(九零后)는 정치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여기까지가 아래 기사를 쓴 라나 미터(Rana Mitter)의 문혁 진단이다. 그의 결론은 중국이 야만적 문혁의 상흔을 거울 삼아 스스로를 “열린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 사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칼 포퍼와 조지 소로스가 연상된다. 폐쇄된 사회보다 열린 사회가 더 낫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지가 중요하다. ‘무작정’ 열린 사회는 담장과 대문 없는 집에 비유할 수 있다. 사악한 유형의 자들이 언제라도 집에 침입해 들어와 무슨 짓을 벌일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부를 수 있다. ‘자유’ 좋은 거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열린 사회” 레토릭을 날리는 이들 중 대부분은 그 심중에 ‘활짝’ 열린 사회의 ‘자유’를 이용해 그 사회를 정치•군사적으로 장악하고 경제적으로 약탈하려는 간악한 흑심을 숨기고 있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세계화 = 열린 사회>라는 거짓 공식을 내세우지만 실상 ‘세계화’는 ‘세계 민영화’와 동의어일 뿐이다. 세계의 민영화를 꿈꾸는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휘황찬란하다. 목적론적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전체주의의 압제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이성과 합리적 토론에 의해 사회를 운영하고…. 어쩌구저쩌구…. 그들이 비록 브라질의 축구 선수 호나우딩요의 현란한 페인팅 동작이 연상될 만큼 혼을 쏙 빼놓는 말의 향연을 벌일지라도 결국엔 “너희 집 문 따고 들어가 식구들 모조리 묶어 놓고 다 털어가겠다”는 말을 교묘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라나 미터(Rana Mitter)의 글을 읽으며 그가 ‘자유주의종교’에 경도돼 있는 역사 연구자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혁에 대한 그의 진단에서 경청할 내용은 분명 있다. 위에서 지적한 세 가지 점은 의미 있는 지적이다. 맘에 안 드는 사람이게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추가적 원인을 하나 더 포함시킨다면 문혁 분석이 보다 더 입체적이 될 것이라 여겨지는 바, 그것은 다름아닌 5•4운동 이후 중국의 전통 사유를 밀어내고 들어선 맑시즘이 지닌 탈율법적 ‘파괴 본능’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4 – 이데올로기적 측면 – 맑시즘의 자기파괴성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채택한 맑시즘은 ‘유대 혁명정신’에서 분기한 것이다. 잉글랜드 퓨러턴이즘의 세속적 변형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그 특유의 선악 이분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절대적 선’에 서 있는 자들은 ‘아나키적 폭력’을 휘둘러도 무관하다는 공통의 도덕률을 가지고 있다.

 

<“우상숭배” 카톨릭교도 VS. “정화된 자들” 퓨리턴>과 <부르주아지 VS.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분법은 정확히 동일 이분법 패턴이다. 전자는 모두 소멸시켜야 할 악마인 반면에 후자는 고귀한 천사다. 따라서 천사는 악마를 ‘폭력적으로’ 응징해도 좋다는 ‘폭력 응징[혁명] 논리’가 간단히 성립된다. 물론 현재의 글로벌 엘리트 집단이 세계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가공할만한 ‘리셋 테러’에 저항해 이런 응징 논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맑시스트들은 그들을 결코 ‘적’으로 설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들을 ‘우회적으로’ 돕는다. 따라서 리셋 테러의 공범자다. 맑시즘이 립써비스로 “만국의 노동자”를 외치며 노동자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의 원래 목적은 일국 부르주아지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국가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최고 도당들인 유대금융 파워와 록펠러 파워 그리고 그들이 조직한 딥스테이트의 공작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런 걸 지적하면 “음모론”이라고 화를 내며 교묘하게 그들을 쉴드 친다. 아주 괴이한 일이다. 그래서 맑시즘을 최종 심급에서 반혁명적이고 반민중적인 ‘페인팅 이데올로기(feinting ideology)’라고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고지대 생활 보호자들에게 연탄 배달 같은 선행을 베풀기도 하지만 평소 그들의 본업은 가난한 사람들 등치고 협박해서 돈을 갈쿠리로 긁어 모으는 고리대 사채업자의 양면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소로스의 색깔혁명 선두에는 항상 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퓨리턴이즘, 프로테스탄티즘 그리고 맑시즘은 공히 유대교에서 온 ‘선민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선택된 자들”인 자신들은 그렇지 못한 열등한 자들보다 우월하며 동시에 선민들의 그 어떤 행위도 ‘신의 의지’와 부합되는 것이기에 선민이 저지르는 폭력마저도 ‘신의 의지’로 해석되고 정당화된다. 그게 무서운 거다. 이 유대인 우월주의의 패러다임은 비유대인들에게 이식되어 ‘유대인 없는 유대교’를 만들어 낸다.(퓨러턴이즘, 프로테스탄티즘, 와하비즘, 맑시즘, 네오콘이즘….)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 자신이 강변하는 것처럼 그들이 정녕 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 주장이 과연 참인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가? 대단히 의심이 가는 레토릭이다. 무조건 자신들이 선택되었다고 믿어 버리는 ‘상상의 의식’이 생기게 되면 필연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자들과 자신을 분리하는 차별의 틈이 생기게 된다. 그 틈을 비집고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우월감에 기반한 ‘폭력’이다. 선택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데 선택 받지 못한 인종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니 폭력은 필연적이다. 그러한 폭력은 수동적이거나 방어적이지 않고 오히려 ‘능동적인 폭력’이다. 쉽게 말해, ‘내로남불’의 정신구조가 선민의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문혁서 벌어진 살인, 구타 그리고 치욕에 의한 자살의 원인은 맑시즘으로부터 기인한 바도 크다. ‘종교적 순수성’에 사로잡힌 잉글랜드 퓨리턴들(거의 IS급이었음)이 저지른 테러 행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퓨리턴의 무자비한 테러가 시공간을 건너 뛰어 중국에서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표방하며 문혁이라는 이름을 달고 격세유전으로 재현된 것이다. 퓨리턴 우월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우월주의로 옷을 갈아 입고 “사회를 혁명한다”는 탈을 뒤집어 쓰고 폭력적 광기를 마음껏 분출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우월주의 –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으로 표현된다 – 는 맑시즘의 기본정신이며 그것은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게 유대 혁명정신의 세속적 형태인 맑시즘이 가진 특장점이다. 뭔가를 파괴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맑시즘을 독보적 혁명이론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권력 전복의 목적을 이룩하는 측면에서 그와 대적할 만한 것은 이제껏 없었다. 그 강력한 에너지는 ‘메시아니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종교적 신앙에 뒤지지 않는 이 다이너마이트급 세속 메시아니즘 앞에서 다른 혁명이론은 ‘폭죽’ 정도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다. 상대가 되질 않는다. 맑시즘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이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해방이론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을 유인해 동원하는데 최적화된 정교함과 폭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맑시즘은 혁명 후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한다. 그것은 유대정신의 자장 안에 있는 ‘자코뱅주의’(Jacob주의)도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해 급진적으로 뭔가 하는 것처럼 정치적 소란을 피우지만 알고 보면 결국 자본 궤도에 순응하여 인민을 ‘경제 자유주의’라는 쇠사슬에 묶어 던져 버리는 공모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게 실제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유대정신으로부터 흘러 나온 사상(맑시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네오콘이즘, 리버럴리즘…)을 써 있는 액면가 그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해방을 위해 이론과 사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타적 위장과 변복에 능하다. 유대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방인 국가에서 정체성을 숨기고 표리부동한 정신 분열상태로 살아가야만 했던 그들의 – 개종자 “콘베르소(Converso)”로서 – 삶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이론이나 사상은 순전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론에 명시된 멋드러진 ‘대의명분’은 전파와 확산을 위한 인테리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맑시즘을 정확히 알려면 그것의 사회공학적 역할을 간파해야 한다. 즉 그것이 거두게 될 수확을 눈여겨 봐야 한다. 동원된 대중은 적절한 보상을 결코 받지 못한다. 그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이용당했음을 그리고 토사구팽 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유대인이 누군가? 누구도 따라 잡지 못할 사상 조작의 대가들이다. 단연코 그 분야에 독보적 존재들이다. 노예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를 금력으로 설득해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만들고 로마를 집어삼키는 정도의 수완을 가진 역전의 용사들이다. 물론 기독교가 유대교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랍비들만큼 토라(모세오경)와 구약에 능통한 자들은 없다.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유대인들이 최상층 ‘사제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분은 급상승했으며 맨 꼭대기를 장악한 그들은 안전하고 부유해질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들보다 뛰어난 현실감각과 네트워크와 금력을 가진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맑시즘의 혁명적 폭발력이 외부로 향할 땐 ‘유대인의 적’을 타도하는 “혁명”의 에너지로 분출되지만, 그 폭발력이 내부로 향하게 되면 문혁과 같은 끔찍한 ‘동족유혈테러’가 전개된다. 그건 맑시즘 내부의 ‘강박증’이 빚어내는 필연적 귀결이다. “유대인 없는 유대교(Judaism without Jews)”인 퓨리턴이즘과 마찬가지로 맑시즘 또한 체내에 메시아니즘 유전자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드시 밖으로 표출되게끔 되어 있다. 퓨리턴이즘은 메시아의 도래를 방해하는 카톨릭 “우상숭배자”를 “이단”으로 여겨 살해한 반면, 맑시즘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세상”의 도래를 방해하는 부르주아지를 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둘 다 야만적 흑백 이분법에 기반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VS, 독재>라는 단순무식한 이분법을 가진 자유주의(Liberalism) 또한 폭력적 광기를 가지기는 매한가지다. “독재”는 “악”이고 “이단”이고 그래서 반드시 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선택’되었고 자신만이 ‘선’이라는 이분법적 확신은 언제나 ‘유혈참사’를 부른다.     

 

지식인들은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모진 탄압을 당했다. 

지식인을 브띠부르조아 계급으로 간주해 2등시민 취급하고 ‘육체노동자 우선주의’를 채택하는 맑시즘의 그릇된 세계관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다. 만약 문혁이 표방했던 가치를 오늘의 중국에 적용한다면 살아남을 중국인은 대단히 적은 수에 불과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혁이란 메시아니즘의 일종인 맑시즘에 잠재태로 존재해 있던 ‘파괴 에너지’가 마오와 군중의 결합을 통해 물질화되었고 60년대 중국의 독특한 정치상황 및 전근대적 의식과 맞물리면서 ‘정치종교’화되어 그 에너지가 내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소용돌이 치면서 10여년간 벌어진 ‘이단 색출’의 마녀사냥이었으며, 자기파괴적 집단 광기였다.  

 

이상으로 중국에서 문혁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정치적, 사회심리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간략히 고찰해 보았다. 문제에 대해 보다 깊게 천착해보면 좋겠으나 본업이 중국사 연구가 아닌 관계로 정도 분석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대신 중국현대사 전공 연구자의 글을 읽어 보도록 하자. 문혁에 대한 다층적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III

보고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전통(傳統), 반전통(反傳統) 그리고 근대(近代)」

윤휘탁(한경대) | 2013-10-21 | 중국현대사

 

연구목표

 

근대 시기 중국의 사상사적 과제는 동양으로 진출해오는 서양 세력의 충격 속에서 ‘서학(西學)’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지, 다시 말해 ‘서학’을 중국의 ‘전통적 학문(中學)’과 어떻게 조화・융합시켜 근대화를 실현시킬 것인지의 문제였다. 이는 한마디로 ‘전통’과 ‘근대’의 대립과 충돌 혹은 조화와 융합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전통과 근대의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화두로 등장하고 있었다. 즉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중국의 빈궁・낙후함을 절감하면서 인성론(人性論)・과학・민주 등 5・4운동 시기의 낡은 화제들에 대해 재해석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전통 문화를 연구하는 열기, 즉 문화열(文化熱)이 일어났다. 중국에서 전통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그런데 전통과 근대의 문제를 논할 때 문화대혁명은 독특한 시기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유학적 전통을 부정하고 파괴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반(反)전통의 분위기 속에서 대일통(大一統)적 역사관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전제적(專制的) 관료 체계, 개인숭배 현상 등 전통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혁 개방 이후 중국 사회의 저변을 흐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중국에서는 공자의 학문과 중국의 고대 문학・철학・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특수 대학인 공자문화대학(孔子文化大學)이 산동성 취푸(曲阜)시에 설립되었다.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인 공자대학은 <중국공자기금회(孔子基金會)>와 취푸(曲阜)사범대학 등이 설립을 주도했고, 교사를 비롯한 캠퍼스 건립은 해외 화교들의 성금으로 충당됐다. 중국은 그동안 개방이 금지된 공자의 옛집을 개방하고 공묘(孔廟)・공부(孔府)・공림(孔林)에 대한 개・보수에 적극 나서는 등 그를 대대적으로 기리는 사업을 전개해왔다. 또한 중국 교육부에서는 세계 각국에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설립해 세계 각지의 대학들과의 교류는 물론이고 중국의 문화나 중국어 등의 교육 및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공자학원 운영비의 20~30% 정도를 지원해주고 있다. 중국 전통의 핵심인 ‘유학’과 ‘공자’가 중국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흐름을 보면, 결국 오늘날 중국 사회의 사유 체계의 추이와 관념상의 변화는 반전통을 표면에 내세운 문화대혁명 시기의 ‘관념론적 몸부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유학적(中華的) 전통에 반대하고 전통의 파괴를 시도했던 문화대혁명은 반전통의 몸부림 속에서도 전통의 부활을 잉태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개혁 개방 이후 중국에서 새롭게 모색되고 있는 중화주의 전통(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 애국주의, ‘중화민족 대가정’ 만들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등)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신(新)중화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중화주의적 전통이 현대적인 재해석을 거쳐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문화대혁명 시기의 ‘관념론적 몸부림’에 대한 이해는, 현대 중국의 전통의 강조와 그에 따른 위상 제고를 위한 몸부림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현대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 속에서 비판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유가적 전통의 의미를 심도 있게 파악하려면, 사회주의적 근대를 실현시키려고 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아무렇게나 짓밟혀진 유교적 전통의 개념과 범주를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와 아울러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反)전통이 사회주의적 근대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반전통이 근대를 의미하는지, 반전통이 순조롭게 근대로 전화되는지, 전통과 근대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대효과

1)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이 차지한 위상과 의미 재조명

 

중국 정치 등 사회과학계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의미를 다룬 것들이 제법 있지만, 국내 역사학계에서의 문화대혁명 연구는 아직까지 ‘연구 상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모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문화대혁명 과정 속에서 드러나고 있던 전통, 반전통, 근대의 의미와 이들 간의 상관성을 다룬 점에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이 어떠한 위상과 의미를 지녔는지를 재조명하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유교적 전통을 철저하게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현대 중국 사회에서 ‘전통이 지닌 의미’가 좀 더 확연하게 잘 드러날 뿐만 아니라, 전통의 파괴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려고 한 ‘사회주의적 근대의 의미와 그 지향성’도 좀 더 명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첫째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전통을 파괴하려는 사회적 풍조가 매우 격렬하게 표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본 연구는 어느 시기보다도 중국의 ‘전통’과 ‘반전통’, ‘반전통’과 ‘전통’의 부활, ‘전통’과 ‘근대’ 사이의 대립과 충돌, 양자의 전화 과정 및 상호 작용 등을 선명하게 엿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둘째 본 연구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전통’과 사회주의적 ‘근대’ 사이의 충돌과 교묘한 융합의 교착점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개혁 개방을 추구한 중국 사회가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사회와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 사회가 전적으로 상호 대립적인 대척점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띠고 있었고, 때로는 전자가 후자의 추진체 역할을 했다는 점 등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2) 한・중 양국의 전통 인식 비교 고찰을 위한 사례로 활용

 

최근 중국에서는 ‘공자문화대학’과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유학적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중화민족의 단결을 주창하고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 짓밟혔던 공자와 유학이 다시 부활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 ‘한류’에 고무되어 있지만, 문화적 주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그래서 중국에서와 같은 전통 문화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작업은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신의 전통 문화에 대한 무차별적인 배격은 곧 자신의 존재 혹은 뿌리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동양적 가치관의 상실이 세간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전통 문화에 대한 부정의 부정, 그리고 전통 문화와 외래문화에 대한 대립적 통일이 절실한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인들이 왜 전통을 파괴하려고 했는지, 또한 파괴된 것처럼 여겨졌던 전통이 왜 개혁개방 이후 다시 부활하고 있는지,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학적 전통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전통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등을 음미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연구 요약

 

1)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과 반(反)전통 :

 

좌경 교조주의가 유학에 초래한 위해(危害)는 우연적이거나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단속적(斷續的)으로 표출되었던 ‘문화 및 역사 영역에서의 허무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문화 및 역사 영역에서의 허무주의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민족 허무주의로서, 중화민족의 모든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고 ‘전면적인 서구화’(全盤西化)를 주장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허무주의로서 중국정부의 단기 목표와 합치되는 관점만 긍정하고 기타 관점은 배척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이 허무주의는 반(反)전통적인 정서 혹은 전통문화에 대한 허무주의가 사회적 기류를 형성하고 있던 문화대혁명 때 “파사구(破四舊)”라는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면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전통 문화의 정수인 유학의 창시자 공자(孔子)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의 기치 하에 단죄되었다.

 

또한 공자의 출생지인 취푸(曲阜)의 공묘(孔廟)・공림(孔林)・공부(孔府) 등을 비롯한 많은 문물들이 훼손되었다.

 

2) 개인숭배, ‘유법투쟁사관(儒法鬪爭史觀)’과 전통의 부활 :

문화대혁명 때 유학적 전통이 격렬하게 공격받고 유학 관련 유물들이 파괴된 데는, 상술한 근대 이후의 반(反)유학적 조류 이외에, 마오쩌뚱에 대한 개인숭배, 전제주의(專制主義)적 관료 통치의 관념적 유산, 유법(儒法)투쟁을 기조로 한 역사관 등의 작용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뚱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인민을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한 뒤, 거기에서 분출되는 그들의 주체성・주관적 능동성을 바탕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려는 인간 중심적인 논리였다. 그러한 신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주창된 것이 계급투쟁사관이었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것을 현실 사회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론적 무기로 사용된 것이 역사를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의 투쟁사로 인식하는 ‘유법투쟁사관(儒法鬪爭史觀)’이었다. 유법투쟁사적 역사인식이 만연된 문화대혁명 시기 문혁파들은 비판하고자 하는 정치 상황을 중국의 역사상 잘 알려진 사건과 대비시켜 반대파를 유가로, 자신들을 법가로 규정한 뒤, 유가는 반동의 무리로, 법가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는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리로 몰아갔다. 그런데 사인방을 비롯한 문혁파들이 인식하고 있던 유학이나 유학적 전통은 ‘본질’이라기보다는 그들만의 시각에 비쳐진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본질로서의 유학’이 아니라 ‘유학이라는 탈을 쓴 허상(虛像)’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주체들이 짓밟고 타도하려고 했던 공자는 유학적 전통의 창시자가 아니라 ‘공자의 탈을 쓴 허수아비’였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부정되고 파괴되었던 유학은 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전통 문화에 대한 허무주의에서 파생된 허구적인 유학이었다.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 희생양이었다고 평가된 공자(孔子) 역시 ‘인격체로서의 공자’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활용된 ‘모조품으로서의 공자상(孔子像)’이었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부정되거나 파괴되었다고 여겨진 유학적 전통 내지 공자는 문화대혁명의 청산과 더불어 부활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전통의 부활’을 선언한 셈이 되어버렸다.

 

3) 마오쩌뚱의 사회상(社會像)과 일그러진 근대 :

한편 마오쩌뚱은 신세계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사회상은 공업과 농업을 시작으로 하는 분업화・전업화(專業化)・시장 경제화・도시화가 억제된 자급자족적인 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사회였다. 이러한 ‘소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사회 저변의 농민까지도 호적(戶籍)에 의해 개별인신적(個別人身的)으로 지배하는, 거대한 전제적 관료 조직이었다. 이 사회에서는 인민이 자유롭게 자주적으로 다른 ‘소사회’의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고 교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전제 국가의 상(像)을 재현시키려는 것과 별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마오쩌뚱이 그려내고자 한 사회상은 ‘근대화’ 과정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사회였다. 마오쩌뚱이 상술한 사회상을 이상향으로 꿈꾼 결과, 인민공사(人民公社) 문제, 지식인 문제, 대학의 교육 개혁 문제 등이 첨예하게 현실 문제로 부각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문화대혁명 시기 ‘서구적 근대’는 중국적 전통과의 대립・충돌・융합의 한가운데서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중국의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은 사상 문화 영역에서의 대혁명을 통해 착취 계급의 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을 타파(‘破四舊’)하고 무산 계급의 새로운 사상・문화・풍속・습관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문혁은 중화 전통 문화, 특히 유가적 전통 문화의 부정을 인식론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유가적 전통은 소위 봉건 사회의 관방 의식 형태였고, 공자는 낡은 문화를 가장 집약한 대표자로서 자연히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파사구(破四舊)’, ‘비림비공(批林批孔)’을 목표로 한 문혁은 곧 전국을 휩쓸었고, 전통 문화의 정수인 유학의 창시자 공자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의 기치 하에 ‘공로이(孔老二)’ 혹은 ‘상갓집 개(喪家犬)’로 폄훼・단죄되었다.

 

1970년대의 ‘비유평법(批儒評法)’ 운동 과정에서 “유가(儒家)는 모두 매국주의(賣國主義)이고 법가는 모두 애국주의”라는 잘못된 ‘유법투쟁사론(儒法鬪爭史論)’이 확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의 역사는 ‘유법투쟁사’로 규정되어 전통적인 역사가 왜곡되었고, 법가식의 봉건적 전제(專制)를 확립하기 위한 여론이 조성되었다. 조반 세력은 중국의 전통을 최대한 활용하여 영사사학적(影射史學的)인 관점을 통해 정치 현실의 반대파들을 공격하고 제거했다. 이 운동 과정에서 유학 관련 책들은 불태워졌고 유가적 전통문화는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중화민족의 전통문화가 창도한 도덕인륜, 예의규범, 사도존엄(師道尊嚴), 경전의 문사자집(文史子集) 등은 쓰레기 취급을 당했고 무산 계급의 신문화도 창조되지 못한 채 문화적 공백만이 생겨났다. 어쩌면 문혁은 허구적인 군중 운동의 장막 뒤에서 진행된 권력투쟁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혁 시기의 정치 문화는 비록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용어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중국 전통문화와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유법투쟁사관’이 사회에 풍미하는 가운데 법가적(法家的) 인물, 특히 진시황은 반동적인 유가를 탄압하고 역사를 발전시킨 인물로 영웅시되었고, 그의 ‘대일통(大一統)’적 조치들은 대단한 공적으로 평가받았다. ‘주자파(走資派)’ 혹은 ‘수양파(修養派)’로 매도된 류싸오치 부류의 실용주의파들은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유가(儒家)로 분류되었고, 이를 제압하려는 마오쩌둥과 그 추종파들은 진보적인 법가로 분류되었으며, 마오쩌둥은 진시황의 이미지로 포장되었다. 마오쩌둥이 소위 ‘주자파’를 제거하기 위해 취한 전제적(專制的)인 조치들은, 마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및 통일 정책과 마찬가지로, 역사 발전과 사상 통일을 위한 필연적인 조치로 간주되었다. 진시황이 전제주의 전횡을 했듯이, 마오쩌둥 역시 영수(領袖)로서 공산당 내에서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전제주의적 전횡을 했다. 문혁의 ‘반전통’ 추세 속에서 타파하려고 했던 유가적인 전제주의 행태가 부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이 유가적이었든 법가적이었든 간에 ‘전제주의 전통’은 문혁 시기에도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父子 관계에 기초한 조상 숭배의 전통이 사회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중국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열광적인 개인숭배는 마오쩌둥에게 ‘황제’ 혹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덧씌웠고, 그를 추종한 인민들에게는 孝順하는 臣民 혹은 자식과 유사한 심리 구조를 갖게 만들어, 마오쩌둥과 인민의 관계가 마치 조상 숭배에서의 부자 관계와 유사한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게 했다. 원래 유가 문화에서 비롯된 조상 숭배 의례가 문혁 시기의 개인숭배 의례에 투영되었고, 황제・조상・아버지에 대한 숭배는 마오쩌둥=황제=아버지에 대한 숭배로 이어져 사실상 유가적 ‘조상 숭배의 전통’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공산 혁명과 더불어 인민들에게 해방과 평등을 만끽하게 해주고 그들을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에게 원시 종교적・미신적인 ‘구세주’나 ‘미륵(彌勒)’같은 존재로 비쳐졌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근대’를 지양하고 있던 신중국에서 원시 종교적・미신적 차원의 ‘구세주’ 신앙의 전통이 다시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당대(當代) 정치 문화 속의 가부장제(家父長制), 당(黨)의 영수(領袖)가 황제와 같은 권력을 지닌 것, 전제주의 관료제, 조상 숭배나 다름없는 개인숭배, 원시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구세주 신앙 등은 분명 전통적인 요소들이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말년의 마오쩌둥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정치상의 전제주의(專制主義), 경제상의 평균주의, 사회 구조상의 공상적인 사회주의였다. 어떠한 의미에서 그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했다.

 

결국 문혁 시기 전통, 특히 유가적 전통문화의 부정, 그것의 現態로서의 ‘비림비공운동’은 造反 세력의 세계관에 자리한 허상과의 싸움이었으며, ‘유법투쟁사관’ 식의 역사 裁斷에 의해 매도되었던 전제주의 전통은, 조상 숭배나 원시 종교 신앙의 양상을 띤 개인숭배 의례 및 유토피아적 평균주의 현상 속에서 부활했던 것이다. 문혁이 기존의 사회관계에 어떠한 혁명적 전환도 가져오지 못해서인지, 전제주의적 전통 요소는 ‘반전통’의 문혁 과정에서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제주의적 전통을 떠받치던 충효, 예, 선공후사(先公後私) 등은, 개혁 개방과 더불어 중화민족, ‘중화전통’이 강조되는 가운데 재평가되면서, ‘신(新)중화주의’의 핵심적 요소로 탈바꿈되어 ‘21세기 중국인’을 이끌어 나가는 정신적 이정표로 환생하고 있다. 이것은 문혁 시기의 반(反)전통이 개혁개방 이후의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국가발전의 목표 속에 반영되어 ‘근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문혁 시기의 반(反)전통은 전통의 파괴보다는 전통의 부활로 이어졌고[유가적 전통에 반대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통은 유사한 형태로 부활하고 있었다], 이것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부분적으로 ‘근대’로 다시 계승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주

[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7261.html

2016-01-21 [아침 햇발] ‘사령부를 포격하라’ /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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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