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일반 · 완정 시론

다시 보는 드레퓌스 사건  

다시 보는 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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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1894년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을 정확히 알게 위해서는 당시 유럽의 ‘지정학적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뒤레프스가 독일의 간첩이네 아니네가 중요한 게 아니다. 거의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 사건의 후폭풍으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갔는지 그리고 누구의 돈으로 기획되었는지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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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차원에서 영국을 경계했던 프랑스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또(Gabriel Hanotaux, 1853-1944)는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세네갈의 다카르(Dakar)에서 홍해 근처 프랑스령 지부티(Djibouti)에 이르는 내륙 횡단 철도를 기획했다. ‘사하라 횡단 철도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만약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횡단 철도가 현실화되면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식민 영토의 지배를 꿈꾸던 영국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된다. 아노또는 독일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일도 이에 호응했다. 이렇게 되니 영국으로서는 외교군사적으로 사면초가가 되었다.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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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점에 프랑스 언론에서 “독일 스파이” 뒤레프스 사건이 ‘뻥하고’ 터진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친드레퓌스와 반드레퓌스로 양분되며 반(反)독일 정서가 팽배해진다. 아노또는 이 사건이 벌어지자 향후 프랑스와 독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될 수 있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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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페르디낭 왈사이 에스테라지(Ferdinand Walsin Esterhazy)가 로스차일드가(家)의 돈을 받고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몰아세우는 증거를 조작해낸 것으로 드러났다. 드레퓌스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프랑스 카톨릭계와 민족주의 세력은 로스차일드의 계략에 말려 들어 뒤레스프가 스파이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반독(反獨) 정서’와 ‘반유대 정서’에 불을 당겼다. 속된 말로 낚인 거다. 낚인 대가는 혹독했다. 카톨릭 교계는 ‘정교분리’라는 철퇴를 맞았다. 3,000개 이상의 카톨릭 학교가 폐쇄되었고 전국의 수도회 또한 해산 당했으며 신규 수도회의 결성은 금지되었다. 민족주의 세력은 “반유대주의”라는 주홍글씨를 얻어 수세에 몰렸으며 이후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비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사회적 금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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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반영론자’ 가브리엘 아노또는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들어선 ‘친영론자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는 아노또의 정책을 모두 뒤집어 버렸다. 아프리카 횡단 대륙 철도 프로젝트는 철회되었다. 이집트 식민지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지배권을 양보했으며 독일과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시켰다. 1904년에 이르러 델카세는 영국과 비밀협약인 ‘영불협약(Entente Cordiale, 앙땅뜨 꼬르디알)’에 서명함으로써 ‘영국의 독일 죽이기’인 1차대전으로 가는 외교적 초석에 협조했다. 영국은 프랑스에게 그 보답으로 자신들에게 별 중요성이 없는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의 영유권을 비밀협약을 통해 인정해주었다. 영국, 프랑스는 겉으로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인데 속으로는 이렇듯 마피아식 비밀 거래를 일삼는다. 대중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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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은 “반유대주의가 만들어낸 정치적 추문”으로 승화되어 대내적으로는 프랑스 국론을 양분시키고 카톨릭 세력과 민족주의(국가주의) 세력을 패퇴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프랑스가 독일과 적대하도록 만들어 대독 영불동맹을 체결하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유대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에 탄력을 주었다. 가히 ‘쓰리 큐션’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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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짭짤하게 재미를 본 영국은 이제 러시아로 넘어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기획하고 있었던 세르게이 비테 백작(Sergei Yulyevich Witte, 1849~1915) – 그는 반영론자인 프랑스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또와 흡사한 ‘지정학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둘은 막역한 사이기도 했다. 비테는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의 산업국가 모델에 따라 러시아를 근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 의 계획을 좌절시키려 ‘공작’을 벌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1905년 비테는 총리직에서 쫓겨났고 그의 후임으로 친영론자 에두아르드 플레스케(Eduard Theodor Pleske, 1852~1904)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그는 영국과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프카니스탄 전체와 페르시아 중요 지역에서 영국의 항구적 지배권을 인정하는데 서명했으며 영국의 바람대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아시아 구간을 대폭 축소시키는데 합의해주었다. 동시에 영국은 막후 공작으로 러일전쟁(1905)서 일본을 도와 러시아 붕괴를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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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프랑스를 ‘살쿠고’ 이어 러시아 제국까지 ‘살쿼’, 1907년에 영러 협상을 이루어냄으로써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을 완성시켰다. 이는 독일을 때려 잡기 위한 국제적 공격 대형을 갖춘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유럽은 1차대전(1914~1918)이 벌어져 ‘피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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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기한 건 제국주의 영국의 외교적 손길(공작)이 닿게 되면 이상하게도 반영론자 혹은 대륙 모델의 산업화를 지향하는 정치인들이 한결같이 실각하고 대신 친영론자이며 부국강병에 별 관심 없는 자들이 그 자리를 메꾼다는 것이다. 이는 ‘작업의 손길’이 아주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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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하루 아침에 나라가 송두리째 흔들리며 두 동강나고, 러시아에서처럼 핵심 국책 철도사업이 하루 아침에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것의 ‘동인(動因)’이 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영국의 ‘외교적 수완’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영국 제국주의와 이해의 궤를 같이하는 유대 뱅커들의 자금력과 네트워크 차원의 협력 그리고 프랜시스 왈싱햄(Francis Walsingham) 이래 조직적인 영국의 해외 첩보공작력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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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통해, 제국주의 영국이 독일(베를린-바그다드 철도루트), 러시아(시베리아 횡단 철도), 프랑스(아프리카 횡단 철도)를 비롯해 기타 국가들이 주도적으로 서로를 연결하고 교역 루트를 만들려는 ‘문명적 시도’를 차단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자신들이 구축한 ‘약탈의 네트워크’가 아닌 다른 네트워크는 모두 ‘파괴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혹은 그것의 동의어인 ‘글로벌리즘(Globalism)’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문명적 세계화’를 방해하며 국가를 쇄국과 정체 그리고 전쟁의 늪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ㅡ[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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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Andres Calamaro - Cuando No Estas 3:30